[경제력 주요업종 편중 전문가 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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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문가들은 경제력 의존 심화 현상에 대해 과거와 달리 접근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과거 대기업들이 정부가 주도하는 성장 드라이브 정책에 편승해 차입경영으로 몸집을 부풀렸던 것과 달리 최근의 경제력 집중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의 자연스런 결과이자 글로벌 경제의 흐름을 반영하는 새로운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김경수 산업자원부 산업정책과장)는 의견이 많다.

송병락 서울대 부총장(경제학)도 "생산품의 70% 이상을 수출하는 삼성전자를 놓고 경제력 의존을 따지는 것은 좁은 시각" 이라고 말했다.

특정 기업이나 업종의 호황 자체를 놓고 바람직하다, 아니다를 논하기 어려운 '신(新)경제력 집중' 상황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건설.섬유 등 어려움을 겪는 업종을 살려 균형 발전을 꾀할 수 있는가 하는 방안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산업연구원 김도훈 산업정책실장은 "잘 나가는 기업과 업종을 견제하기 보다 뒤떨어진 업종을 끌어 올려 균형을 맞추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전처럼 대기업을 물리적으로 규제하는 방식은 이제 곤란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낙후한 업종이 정보화.온라인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정부가 지식기반 인프라를 제공하고▶시중 자금이 장사가 잘되는 쪽에 몰려 유망 중견기업이 어려움에 처하지 않도록 금융제도를 정비하고 금융시장을 빨리 안정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제력 의존 심화는 경쟁의 결과〓김기원(방송통신대.경제학) 교수는 "역사적으로 외환위기 같은 큰 불황을 만나면 대규모 구조조정이 뒤따르면서 어떤 형태든 경제력 집중 현상이 나타나게 마련" 이라고 전제한 뒤 "이제는 정부나 카르텔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쟁력과 기술력이 진입장벽을 쌓기 때문에 같은 업종이라도 기업에 따라 실적이 크게 차이난다" 고 진단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재벌이 자금만 조달하면 어떤 사업이라도 뛰어들 수 있었지만 이제는 기술력을 뒷받침해야 신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병락 부총장은 "박세리.김미현씨가 해외에서 경쟁하는 것처럼 세계화 시대에 국제경쟁력이 있는 기업이 잘 될 수 밖에 없고 이는 기술수준과 인적자원에 따른 결과" 라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박사는 "무작정 차입에 의존해 사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신규 투자는 자금.제품력 등 경영 실력의 결과이기 때문에 특정 업체와 업종이 뛰어난 성과를 얻는 데서 나타나는 경제력 집중을 우려할 필요는 없다" 고 말했다.

그는 "한보나 기아처럼 능력을 넘어선 투자를 했다가 쓰러진 기업을 본 기업들이 가용 재원 범위 안에서 투자할 것이기 때문에 특정 기업이 특정 업종에 집중 투자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고 덧붙였다.

◇균형성장으로 풀어야〓경제력 집중 문제는 한국 경제의 오랜 딜레마다. 개방경제 체제에서 대기업을 배제하면 대외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

산업자원부 관계자는 "가령 차세대 이동통신(IMT-2000)사업만 해도 국내 대기업을 배제하면 당장 선진 다국적 기업들이 차고 들어올 것" 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부탁한 국책연구원 출신의 한 경제학자는 "삼성 등 3개 그룹의 견제세력은 공기업이나 외국기업에서 찾을 수 있을 것" 이라면서 "특히 공기업 경영의 효율성을 높여 대기업의 독과점 체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고 말했다.

송병락 부총장은 "세계 경쟁이 가능하도록 기업이 클 수 있는 풍토를 만들고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 이라고 강조했다.

박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부원장은 선진국보다 수준이 낮은 자본재 산업과 화학산업을 끌어올리기 위해 적극적인 외자유치를 주문했다.

朴부원장은 "외국인 투자유치 자유지역 등을 설정해서라도 외국기업을 끌어들여 첨단기술과 마케팅 능력을 흡수하고 이를 통해 산업의 균형성장을 꾀해야 한다" 고 말했다.

김경수 산업정책과장은 "전통.재래산업이 새 경영환경에 적응하면서 맞을 구조조정.실업 충격을 줄여주는 일이 필요하다" 면서 "기업집단 지정.출자총액제한 같은 대기업 규제제도는 설 땅을 잃고 있다" 고 말했다.

김도훈 산업정책실장은 "반도체 같은 일부 업종의 호황에 따른 경기의 착시(錯視)현상과 여타 산업을 경시하는 풍조를 경계해야 한다" 면서 "정부는 재래산업이나 중견기업들이 독자적으로 하기 어려운 전자상거래 등을 지원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전경련 원용득 산업조사팀장은 "전자산업을 제외한 국내 제조업체의 임금과 생산성이 선진국보다 여전히 취약하다" 며 "벤처나 IT산업도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민관 합동으로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조명현 교수는 "제2의 성장엔진으로 발전하고 있는 벤처기업들이 자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정부가 토양을 마련해야 하며 이를 통해 경제력 의존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고 말했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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