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한국인 “일본은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과거사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던 한·일 관계에 변화의 기운이 역력하다. 뿌리깊은 우월감을 떨친 일본인들이 한국의 대중 스타에 열광하는가 하면, 식민통치 기간 말살하려 했던 한국어를 현직 총리의 미수(米壽) 노모와 퍼스트레이디가 배우고 있다. ‘왜색’ 또는 ‘식민잔재’로 한국 땅에서 배척당하던 일본 문화도 당당히 시민권을 갖고 젊은이들을 매혹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중앙일보의 신년 여론조사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여전히 일본은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이지만 그 비율(32.6%)은 5년 전(62%)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고, 20대 응답자들에게는 더 이상 가장 싫은 나라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흐름 속에 일왕의 방한 문제가 양국 관계의 큰 화두로 떠올랐다. 사안의 민감성으로 인해 논의 자체가 미뤄져 왔지만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화두가 된 것이다. 중앙일보는 한·일 양국에서 싹튼 상호 인식의 변화를 짚어보고 일본의 백제학 전문가로부터 일왕 방한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았다.

지난 8일 서울 광화문의 교보문고 일본서적 코너. 교복 차림의 여고생 세 명이 일본 연예잡지 진열대 앞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라시, 너무 귀엽지 않아?” “새로 나온 캇툰 공연 DVD 샀어?” 그들은 일본 인기 아이돌 그룹의 근황을 얘기했다. 또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온 잡지를 몇 권씩 챙겨 들었다. 최보람(고2)양은 “같은 반 친구 절반 이상이 일본 연예인을 좋아한다. 일본 드라마나 쇼 프로를 모르면 대화에 끼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어디가 서울이고, 어디가 도쿄일까. 일본 사진작가 미조베 슈지의 사진집 『여기와 저기』에서 인용했다. 사진 중앙을 기준으로 왼쪽이 2004년 서울 종로 3가 풍경이고, 오른쪽은 같은 해 도쿄 유라쿠초 모습이다(작가 인터뷰 31면). 1990년대 이후 양국 대중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양국 젊은이들의 패션도 점점 닮아가고 있다. 두 나라 젊은이 사이의 문화적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 인터넷 또한 양국의 거리를 축소시키고 있다.


예전 ‘가깝고도 먼 나라’로 수식되던 일본, 그러나 요즘 젊은이에게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정서적으로도) 가까운 나라’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래, 만화·영화·드라마·음악 등 일본의 다양한 문화콘텐트가 젊은이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케이블 TV에서 일본 드라마를 언제든 만날 수 있고, 인터넷에서도 일본 후지TV의 애니메이션을 실시간 감상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주로 모이는 홍익대·이태원 등지에는 종업원들이 “이랏샤이마세~”라고 인사하는 라면집과 일식주점이 즐비하다. ‘일류(日流)’ 혹은 ‘닛폰필(Nippon Feel)’이라는 단어는 요즘 젊은이에게 ‘세련된 취향’과 동의어로 쓰인다.

이제 일본문화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도 몰라보게 돌려놓고 있다. 지난해 10월 동북아역사재단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의 44.3%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008년에 비해 22.3%포인트나 높아진 수치다. 특히 30대(45.7%)의 긍정적인 답변이 다른 세대에 비해 높았다. 식민지 경험에서 비롯된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뿌리깊은 적대감은 30대 이하의 젊은 층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양국 대중문화 교류와 영토·과거사 논란이 각기 따로 움직이는 모양새마저 보이고 있다. 일례로 지난해 말 독도 문제가 양국 외교 현안으로 다시 불거졌지만,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이 개최한 일본영화제 등 문화행사에는 연일 젊은이들로 북적댔다.

사회 일각에선 이런 젊은이들의 대일 인식 변화에 대해 “지나친 일본 추종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상대방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장점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한·일 관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부 이진원 교수는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세대들이 만들어갈 한·일 관계에 기대를 걸고 있다”며 “이에 못지않게 우리 젊은이들도 과거사나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일본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희 기자



일본인 63% “한국에 대해 친밀감 느낀다”

# 지난 주말 도쿄 이케부쿠로(池袋)의 야마다전기 빌딩 7층 식당가. 지난해 11월 문을 연 한식당 ‘Kollabo’에서 젊은 남녀 커플이 순두부찌개와 돌솥비빔밥을 주문한다. 평소 잡채·떡볶이를 즐긴다는 이즈카 마리(23)는 “한식, 특히 비빔밥은 야채가 많아 건강식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라고 말했다. 고객의 95% 이상이 일본인이다. 주말엔 하루 평균 400명이 다녀갔다.

# 지난해 가을 도쿄 신주쿠 교엔(御苑)공원. 50대 중년여성 4명이 잔디밭에 앉아 한글 동화책을 펼쳤다. 함께 온 한국인 여성과 함께 한 문장 한 문장 읽고, 해석하기를 30여 분, 이번엔 반대로 한국인 여성에게 일본 신문 사설을 교재 삼아 일본어를 가르친다. 이처럼 도쿄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인들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이처럼 일본 내 한식과 한국어의 위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김치는 일본에서 단무지 판매량을 제치고 절임식품 1위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김치를 직접 담그겠다는 주부들도 늘어 ‘김치교실’이 곳곳에서 열리는가 하면 ‘김치 담그기 한국 여행’도 생겼다. 수퍼에 가면 가장 목 좋은 곳에 육개장·곰탕·김치찌개 등이 진열돼 있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0여 년 전만 해도 한식당 이용자는 주로 재일동포와 한국인 주재원들이었다. 한국 여행 혹은 출장을 가본 사람들 중 더러 “김치와 불고기를 좋아한다”고 하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그랬던 한식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은 결정적 계기는 한류 붐과, 2002년 한·일 월드컵이다. 한국의 경제성장도 큰 요인이 됐다. ‘겨울연가’ 등 한국 드라마가 일본 주부들을 사로잡았고, 한·일 월드컵과 2005년 한·일 우정의 해를 통해 양국 간 교류는 개화기를 맞았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일본인은 사상 처음으로 300만 명을 넘어 305만 명을 기록했다.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도 약 170만 명에 이른다. 한국어 열기도 대단하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추산하고 있는 일본 전국의 한국어 학습 인구는 약 200만 명. 한국에 대한 인식 변화는 지난해 내각부의 설문조사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63.1%로 1978년 조사 시작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양국 간 학술교류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5월 도쿄대에 한국학 연구의 구심점이 될 한국연구센터를 설립한다. 2008년엔 대학교수와 학자·변호사 등을 주축으로 일본의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한 ‘한국병합 100년 시민네트워크’가 출범했다. 이 단체 사무차장인 엄창준 리츠메이칸대 교수는 “일본인들이 스스로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잡으려고 조직한 단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설명했다.

도쿄=박소영 특파원

▶ 조사 통계표 다운로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