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기획 - 금융의 삼성전자를 꿈꾼다 <5>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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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중국 베이징 하나은행 상담 창구를 찾은 손님(왼쪽)에게 현지 직원이 신상품을 소개하고 있다. 공무원처럼 불친절하고 딱딱하던 중국의 은행 창구가 고객 서비스를 중시하는 쪽으로 서서히 바뀌면서 한국형 PB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다. [특별취재팀]

베이징(北京)의 직장인 쭝웨이(28·여)는 요즘 중국 우리은행의 직불카드를 애용한다. “다양한 서비스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에서다. 현지 은행들이 발급하는 직불카드에는 현금을 찾거나 물건 값을 결제하는 등 기본적인 기능 외에 부가 서비스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다. 반면 우리은행은 직불카드에 국내에서처럼 가맹점 할인, 포인트 적립, 수수료 면제 등 다양한 서비스를 넣었다. 특히 VIP 회원들에게 중국 내 어느 지역, 어느 은행에서 돈을 찾더라도 수수료를 면제해 주고 있다. 이는 현지 은행에서는 보기 드문 서비스다. 그 덕에 호응이 컸다. 우리은행의 직불카드는 최근 7개월간 1만8700좌가 발급됐다. 이 중 65%는 중국인 고객이다. 카드로 인해 증가한 예금만 2억7600만 위안에 이른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금융사들이 ‘인큐베이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종전엔 교민과 우리 기업, 즉 ‘굳은 자’에게 많이 의존했다. 중국에 나가면 일단 이걸로 기본은 한다. 그러나 그게 한계이기도 하다. 중국인 고객, 그리고 중국에 진출한 해외 기업들까지 고객으로 끌어당기지 않으면 클 수가 없는 상황이 됐다.

이에 따라 우리 금융사들은 중국에서 본격적인 뿌리 내리기를 시도하고 있다. 2007년 이후 현지법인으로 속속 전환하고 있는 은행이 선두에 섰고, 보험·리스·카드사도 영역 넓히기에 나섰다.

중국 금융사들의 총 자산규모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로 커졌다. 은행 대출만 해도 연평균 15~19%씩 늘고 있다. 해외 유명 금융사들도 ‘기회의 땅’을 향해 진군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유광열 주중 재경관은 “한국 금융사는 상품 개발과 서비스에서 중국보다 나은 데다 문화·지리적으로도 다른 나라 금융사에 비해 이점이 있다”며 “이런 ‘코리아 프리미엄’을 충분히 활용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대륙의 품에 안겨라=김인환 하나은행 중국 법인장은 요즘 현지인 분행장(지점장)감을 물색하고 있다. 인적 네트워크가 중시되는 ‘관시(關係) 문화’의 특성상 국내에서 파견된 인력이 현지인과 경쟁하기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최근 접촉한 한 외부 인력은 100만 위안(약 1억6600만원)의 연봉을 요구했다. 국내와 비교해봐도 상당한 고임금이다. 김 법인장은 “현지화의 성공 여부는 결국 우수 인력의 확보에 달렸다”면서 “능력만 있다면 행장보다 더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나은행은 현재 전체 직원 344명 중 319명(93%)이 중국인이다. 이사회 의장, 부행장은 물론 6명의 지행(출장소)장 중 5명이 현지인이다. 김 법인장은 “가장 앞서가는 HSBC는 분행장을 모두 중국인으로 쓰고 있다”며 “몇 년 안에 국내에서 파견된 관리자가 필요 없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성과와 보상을 철저히 연결시키는 현지 문화에 맞춰 평가·보상 시스템도 확 뜯어 고쳤다. 그 결과 직원들의 일하는 태도가 확 바뀌었다고 한다.

◆서비스로 승부하라=“과잉 친절 아닌가요?” 김태완 신한은행 베이징 분행장은 부임 초기 현지 직원들에게 한국식 서비스를 교육시키면서 이런 반응을 자주 접했다. 일 처리에 시간이 걸릴 땐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라는 대목에서도 직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창구 직원이 통장을 집어 던지듯 건네줄 정도로 관료화된 게 현지 은행 분위기이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요즘은 프라이빗뱅킹(PB) 서비스의 개념이 확산되는 등 시장에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신한은행도 베이징 분행에 VIP 코너를 따로 만들어 놓았다.

현재 우리 돈으로 20억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중국 내 자산가는 82만 명을 넘는다. 5~10년 내 세계 최대의 PB시장이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중국 소비자들이 서비스에 눈 뜨면서 금융업 판도도 바뀌고 있다. 고객 서비스를 강조한 초상(招商)은행 등이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은행에 불과했던 이 은행은 인터넷 뱅킹·PB 서비스·신용카드 마케팅 등을 선도하며 급성장했다.

지금은 공상은행·건설은행 등 옛 국영은행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김희태 우리은행 법인장은 “점포망에서 열세이지만 우리가 강점을 가진 소매와 PB를 무기로 공략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미개척 시장을 공략하라=지난해 기업은행은 외국계 은행으로는 처음으로 톈진(天津)에 법인본부를 설치했다. 문호성 법인장은 “국내 은행 간 출혈 경쟁을 피하고 시장 선점 효과를 노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당국도 적극 협조해 첫 외국계 법인이라는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렸다. 이 지역에는 이미 200여 개 국내 기업이 진출해 있어 기업은행으로선 ‘텃밭’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요즘 톈진의 성장 속도는 베이징·상하이 등 ‘1급 도시’들을 넘어선다. 중국 전체의 지난해 성장률은 8%대였지만, 톈진은 그 두 배에 가깝다.

삼성생명도 지난해 톈진으로 영업 반경을 넓혔다. 2005년 진출한 베이징에는 이미 45개 보험사가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인력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험설계사 400여 명을 확보했을 뿐이다. 하지만 새롭게 진출한 톈진에선 1년이 못 돼 300여 명을 모았다. LIG보험도 지난해 중국에 진출하면서 법인본부를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에 뒀다.

글로벌 금융사들도 중국의 서부 대개발 정책 등에 발맞춰 지방 공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씨티는 지난해 충칭(重慶)에 9번째 지역본부를 설립하고, 후베이(湖北)·랴오닝(遼寧)성에도 대출회사를 냈다. 앤드루 아우 중국 씨티 최고경영자(CEO)는 “이미 진출한 주요 도시 외에도 금융 서비스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는 지역으로 확장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준현(베트남·캄보디아), 김원배(인도네시아), 김영훈(미국), 조민근(중국), 박현영(인도·홍콩), 한애란(두바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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