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배의 유럽통신] 원전 KO패 프랑스 “KEPCO가 뭐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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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송년 파티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술에 취해버린 기분이다.”

지난해 말 프랑스 언론은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 발전 공사 수주에서 한국에 패한 것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원전 강국 프랑스가 해외 공사 한 번 안 해본 한국에 졌다는 게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저마다 “켑코(KEPCO·한국전력)가 도대체 어디야”라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최근 유럽에서 한국 기업의 활약은 눈부시다. 유럽 언론들은 한국 경제 특집을 잇따라 내보냈다. 모두들 그 시작을 한국 기업의 역동성에서 찾고 있다.

대표 주자는 삼성전자다. 프랑스에서 삼성전자 휴대전화는 2∼3년 전까지도 노키아에 한참 밀리는 2위였다. 그러나 지금은 노키아보다 두 배가 더 팔린다. TV 등 주요 가전제품도 한국산이 1위다.

지난해 초 프랑스 대통령궁, 유럽연합(EU) 상임위원회 회의장, 12월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장 등 취재를 가는 주요 장소마다 모두 삼성 TV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삼성전자 프랑스 법인은 프랑스 대학생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은 회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기아자동차는 소형차 ‘시드’의 돌풍 덕분에 주목을 받고 있다. 마케팅 전략으로 후원을 시작한 프랑스 프로축구팀 보르도가 2008년부터 줄곧 1위에 오르면서 브랜드 인지도도 크게 높아졌다. 또 대한항공은 런던 대영박물관과 파리 루브르 박물관, 상트페테르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멀티미디어 가이드를 시작했다. 연간 수천만 명에 달하는 세계의 문화 애호가와 관광객들은 ‘KOREAN AIR’라고 쓰인 기기를 들고 전시품을 감상하고 있다.

원전 수주는 더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원전 강국 프랑스가 토탈·아레바·EDF 등 대표 기업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나섰다가 한국에 충격적인 KO패를 당한 것이다. 프랑스는 한국 기업이 입찰 명단에 있는 것을 보고 UAE가 가격 협상용으로 끼워넣은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한국에 패했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지난해 초 한국 위기설을 경고하던 유럽의 언론들, 우리 정부가 아무리 위기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던 그들도 우리 기업의 성적표에는 할 말이 없어졌다.

전진배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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