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이성교 '동해안을 지나며'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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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가만히 있어도

그냥 흐르는 것이다

깊은 심연으로

마구마구 흐르는 것이다

들판에서도

시퍼런 것이 마구 일어서는데

하얀 파도가 나를 마구 가리고 있다

어느 솔밭 가

이름 없는 무덤에도

이상한 그늘이 져

마구 눈물이 퍼지고 있다

하얀 꽃이 피고 있다

내 하찮은 출현에도

바다는 부풀고 있다

- 이성교(68) '동해안을 지나며' 중

동해안의 한 마을에서 바다를 보며 자란 소년이 시인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그 바닷가를 지날 때 바다는 무심할 수가 없다.

파도를 일으키며 소리내 달려들고 시인의 눈을 할퀴고 마음을 할퀸다. 오래 집 떠난 주인을 맞는 강아지이기라도 한 듯. 고향이란 그런 것이다.

가까이에서도 멀리서도 잠들지 않고 달려오는 것, 동해가 시인에게 하는 짓거리가 바로 그렇게 부풀어오르는 것인 듯.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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