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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⑥ 미 8기병연대 3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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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50년 11월 1일 새벽 1시쯤이었다. 나는 길을 재촉했다. 영변의 국군 1사단 사령부를 향해 지프를 달렸다. 밤길을 달리는 지프 뒤로 스쳐가는 바람이 차가웠다. 불안감과 초조함이 스쳤다가 지나가는 바람처럼 끊임없이 내 얼굴로 불어닥치고 있었다. 운산으로 나가 있던 3개 연대의 철수는 순조로울까. 이들은 8기병 연대처럼 무지막지한 공격에 노출된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운산 쪽에선 포성이 끊이지 않고 들려 왔다. 윌리엄 헤닉 미 10고사포단장의 고사포와 박격포들이 불을 뿜고 있는 소리였다. 다행이었다. 아군 포병이 지원 사격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정상적인 철수 작전이 헤닉의 포 사격 지원 아래 진행 중이라는 믿음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윌리엄 헤닉 대령이 지휘하는 미 10고사포단이 1950년 11월 1일 평북 운산의 중공군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다. 10고사포단은 10월 31일 밤과 다음 날 새벽까지 1만3000발의 포탄을 퍼붓는 격렬한 포격으로 중공군의 공세를 꺾어 국군 1사단의 순조로운 철수를 도왔다.

헤닉은 나와의 약속대로 최대한의 포 사격으로 국군 1사단 운산 전선 병력의 철수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날 밤 사단 병력은 전면 철수했다. 일부 연대 병력이 다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편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후퇴할 수 있었다. 철수는 11월 1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헤닉은 보유한 1만5000발의 포탄 중 1만3000발을 소진했다. 헤닉이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포격을 가하는 바람에 적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서 국군 1사단의 3개 연대 병력과 헤닉의 고사포단 병력도 무사히 후방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국군 1사단 주둔지를 통과해 수풍댐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 1기병사단 8연대가 문제였다. 그 가운데 3대대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국군 12연대장으로 전투 경험이 풍부하면서 기지와 용맹이 돋보였던 김점곤 대령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후퇴 길에 있는데, 미 8기병연대 3대대의 상황이 너무 급합니다. 구원을 요청해 왔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각 대답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구출해야 한다.” 김 대령은 연대 내 가장 활약이 뛰어난 ‘평양 축구부’ 수색조를 급파했다. 12연대에서 수색 정찰에 가장 뛰어난 팀이었다. 평양 출신이자 축구 선수였던 젊은이들로 구성된 수색조였다. 각종 전장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김 대령이 애지중지하던 팀이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급히 ‘평양 축구부’ 수색팀을 3대대가 전면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있는 지역에 파견했으나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겨우 3~4명에 불과한 미군을 구한 뒤 중공군의 공격을 피해 빠져나왔다.

미 8기병연대 3대대를 대상으로 중공군은 정면 공격과 함께 우회 공격 전술을 구사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이 잘 쓰는 방식이었다. 정면으로 압박하면서 잔여 병력을 측방으로 우회해 후방을 포위하는 전법이다. 미 8기병연대 3대대는 정면 공격 외에 부대 서쪽으로 우회한 중공군 병력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정면과 측방, 후방에서 공격하면서 범위를 좁혀드는 중공군에게 3대대는 ‘독 안에 든 쥐’의 신세였다. 김 대령의 수색 정찰조가 급파됐지만 밀려드는 중공군의 공세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3대대의 상황을 전해 들으면서 나는 마음이 아팠다. 특히 그들은 낙동강 전선에서 다부동을 방어할 때 우리 1사단의 왼쪽, 즉 좌익에 해당하는 왜관 동쪽 303고지에서 북한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대대 통신소대 26명이 적에게 포로로 잡혀 전원 포박된 채 사살을 당한 부대였기 때문이다.

국군 1사단이 중공군의 1차 공세에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오보가 외신으로 나간 적이 있다. 일부 미 언론이 이 전투를 보도하면서 ‘미 8기병연대와 한국군 1사단 전멸’이라고 잘못 보도했기 때문이다. 3대대의 병력 800명 가운데 이 전투에서 600여 명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이 되는 처참한 결과가 빚어졌다.

미군으로서는 이 전투가 더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호바트 게이 1기병사단장은 예하 5기병연대를 투입해 8기병연대 3대대를 구출하려고 했지만 실패였다. 중공군은 낮에는 산에 불을 피워 연막을 형성하면서 참호 속에 숨어 지냈기 때문에 찾아내기 힘들었다. 공격 목표를 찾을 수 없던 게이 1기병사단장은 11월 2일 마침내 철수 명령을 내렸다. 미군 역사상 예하 부대가 적의 포위에 갇혀 있는 상황을 알면서도 구출을 포기한 전례는 이제껏 없었다. 미군이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사건이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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