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운산 쪽에선 포성이 끊이지 않고 들려 왔다. 윌리엄 헤닉 미 10고사포단장의 고사포와 박격포들이 불을 뿜고 있는 소리였다. 다행이었다. 아군 포병이 지원 사격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정상적인 철수 작전이 헤닉의 포 사격 지원 아래 진행 중이라는 믿음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윌리엄 헤닉 대령이 지휘하는 미 10고사포단이 1950년 11월 1일 평북 운산의 중공군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다. 10고사포단은 10월 31일 밤과 다음 날 새벽까지 1만3000발의 포탄을 퍼붓는 격렬한 포격으로 중공군의 공세를 꺾어 국군 1사단의 순조로운 철수를 도왔다.
그러나 국군 1사단 주둔지를 통과해 수풍댐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 1기병사단 8연대가 문제였다. 그 가운데 3대대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국군 12연대장으로 전투 경험이 풍부하면서 기지와 용맹이 돋보였던 김점곤 대령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후퇴 길에 있는데, 미 8기병연대 3대대의 상황이 너무 급합니다. 구원을 요청해 왔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라는 내용이었다.
미 8기병연대 3대대를 대상으로 중공군은 정면 공격과 함께 우회 공격 전술을 구사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이 잘 쓰는 방식이었다. 정면으로 압박하면서 잔여 병력을 측방으로 우회해 후방을 포위하는 전법이다. 미 8기병연대 3대대는 정면 공격 외에 부대 서쪽으로 우회한 중공군 병력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정면과 측방, 후방에서 공격하면서 범위를 좁혀드는 중공군에게 3대대는 ‘독 안에 든 쥐’의 신세였다. 김 대령의 수색 정찰조가 급파됐지만 밀려드는 중공군의 공세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3대대의 상황을 전해 들으면서 나는 마음이 아팠다. 특히 그들은 낙동강 전선에서 다부동을 방어할 때 우리 1사단의 왼쪽, 즉 좌익에 해당하는 왜관 동쪽 303고지에서 북한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대대 통신소대 26명이 적에게 포로로 잡혀 전원 포박된 채 사살을 당한 부대였기 때문이다.
국군 1사단이 중공군의 1차 공세에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오보가 외신으로 나간 적이 있다. 일부 미 언론이 이 전투를 보도하면서 ‘미 8기병연대와 한국군 1사단 전멸’이라고 잘못 보도했기 때문이다. 3대대의 병력 800명 가운데 이 전투에서 600여 명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이 되는 처참한 결과가 빚어졌다.
미군으로서는 이 전투가 더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호바트 게이 1기병사단장은 예하 5기병연대를 투입해 8기병연대 3대대를 구출하려고 했지만 실패였다. 중공군은 낮에는 산에 불을 피워 연막을 형성하면서 참호 속에 숨어 지냈기 때문에 찾아내기 힘들었다. 공격 목표를 찾을 수 없던 게이 1기병사단장은 11월 2일 마침내 철수 명령을 내렸다. 미군 역사상 예하 부대가 적의 포위에 갇혀 있는 상황을 알면서도 구출을 포기한 전례는 이제껏 없었다. 미군이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사건이었다.
백선엽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