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이 있는 책읽기] 마주치다 눈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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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치다 눈뜨다
지승호 지음
그린비, 416쪽, 1만2000원

“인터뷰어가 지켜야 할 몇 가지 코드가 있는데, 첫째로 가장 중요한 게 그 사람을 만나야지,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나면 안 된다는 거거든요. 인터뷰가 겉돌거나 수박 겉핥기 식으로 흐르는 경우, 그건 십중팔구 인터뷰어가 인터뷰이에 대해 가진 선입견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아 그 사람의 실체를 만나는게 아니라 그 이미지만 만나기 때문이죠.”(김어준과의 인터뷰 중)

위험한 시대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세계는 끊임없는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고, 국내에서는 국가보안법과 친일청산 문제를 두고 정치권이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다. 안전불감증이란 구호에도 아랑곳없이 수많은 사고가 곳곳에서 터지고 정치개혁 하자는 목소리는 크지만 정작 정치권의 비리는 끝간 데를 모른다. 인성이나 적성은 뒷전인 채 입시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육현실은 자기방향을 잃은 지 오래고, 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 사이에 놓인 담장은 소통이 없는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

위험한 시대에 위험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대단히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언제나 세상에 대한 자극적인 도발을 통해 끊임없이 불편함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홍세화씨는 사춘기 소년 같은 쑥스러운 모습에 한없는 온화함을 품고 있지만 작은 것 하나 허용하지 않고 세상과 긴장하며 싸우는 불편한 논객이다.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의 말을 빌리면 ‘프랑스에서 우리나라로 망명 온 우리 안에서의 망명객’이다. 동시에 홍세화를 이렇게 표현하는 김어준은 ‘금밟기를 통해 부딪히고 비상식의 세상에 발랄하게 일탈하는’ 엽기적인 야유와 냉소의 소유자이다. 진중권에게 삶이란 끊임없는 ‘트러블’이고 그의 독설은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다. 이른바 하늘에 바라는 것이 없기에 눈치 볼 것도 없다는 지독한 지식인이다. 실러의 말을 빌린 그의 글에서 ‘지식인은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하는 얘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야말로 피곤한 위험주의자가 아닐 수 없다. 반면 학생들에게 ‘참되거라 바르거라’고 가르쳐야 할 한홍구 교수는 ‘양심적 병역거부권 인정’과 파병 반대를 소리 높여 외치는 ‘불온주의자(?)’다. 김동춘 교수는 모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좌충우돌하며 사소한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최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를 만들어 역사의 상처를 들쑤시는 중이다. 겉보기에는 모범생이지만 속에는 불덩이를 지니고 사는 손석희 아나운서나, 거침없이 강자를 감시하고 그들의 약점을 파헤치는 신강균 기자와 최원석PD도 정말 못말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떤 이에게는 천신만고 끝에 완성된 조국근대화를 무위로 돌리려는 ‘불온주의자’로, 어떤 이에게는 ‘자기 땅에서 유배된’ 소수자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더 나아가 ‘대한민국 1%의 힘’이 수용되고 용납되는 경제동물의 사회에서 힘들고 외로운 성찰을 통해 인간 가치의 본령을 고민하고, 이 시대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선지자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들의 비판적이고 저돌적인 시선에는 날림으로 지은 상가 건물 같은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이 놓여 있다. 서구에서 200년 동안 이룬 성과를 단 30년 만에 숨가쁘게 넘어선 조국의 근대화는 ‘한강의 기적’을 통해 휘황찬란한 물질적 풍요를 선사했지만, 그에 걸맞은 정신적 가치가 성숙할 기회를 앗아가기도 했다. 우리는 ‘비교적 균등한 노동력’을 양산하기 위한 표준화된 KS적 삶을 강요받았고, 교육 과정에서 이미 규격화된 공산품으로 포장되었다. 그 결과로 ‘존재의 고귀함을 추구하지 않는 사회, 자신의 사회 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해 긴장하지 않는 사회, 자기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물질적인 풍요만 좇는 천편일률적인 삶 속에서 자기의 무늬와 향기를 잃어버렸다. 그러기에 현실을 뜻하는 ‘레알리테’는 ‘고쳐나가야 하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현실,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로 인식될 뿐이다. 공공적 가치나 공동선은 제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고, 과도한 물신주의는 다양하게 포장돼 모든 사람이 삶을 통해 추구하는 최종목표가 되고 말았다.

부끄러움의 부재, 2004년 가을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초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사납고 불편한’ 선생들을 만나는 과정은 우리 안의 염치를 되살리면서, 도발적 상상력을 통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새로운 희망의 작업이 될 수 있다. 1년 내내 웬만한 강연회를 부지런히 찾아다녀도 만나기 힘든 그들을 한 권의 책 안에서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풍요로운 영혼의 선물이 될 만하다.

이윤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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