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광장] '통독10년' 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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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분단과 통일의 현장 베를린도 그동안 참으로 많이 변했다.

1990년 7월. 올해처럼 유난히도 무더웠던 그해 여름 기자는 베를린 특파원으로 부임했었다.당시는 정말 모든 게 정신없이 돌아갔다.이미 7월1일자로 동.서독 화폐 통합이 이뤄져 사실상 통일을 이룩했던 독일 국민들은 통일의 마무리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통일의 마지막 단추를 꿰고 있던 독일 국민들의 뿌듯한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만나는 사람마다 "다음 차례는 한국" 이라며 분단국 에서 온 기자를 위로했다.

2000년 8월. 다시 특파원으로 부임한 베를린은 이제 거대한 공사판으로 바뀌었다.특히 동.서베를린 경계지역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알렉산더 광장까지의 운터 덴 린덴가(街)와 프리드리히 슈트라세, 그리고 포츠담 광장 주변은 '모든 걸 다 바꿔' 다.

어디를 가도 크레인이 눈에 띄고 인부들 망치소리가 요란하다.황금의 30년대 유럽 문화.예술 중심지였던 포츠담 광장엔 이제 소니와 다임러 벤츠사 건물이 번영의 21세기를 약속하듯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독일인들의 표정도 다르다.통일의 감격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동쪽이나 서쪽이나 피곤한 표정들이 역력하다.통일비용 때문에 형편이 어려워진 서쪽 주민이나,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2등 국민이라고 느끼고 있는 동쪽 주민 모두 피곤하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 때문일까. 길거리에서 만나는 독일인들의 시선이 10년 전보다 싸늘해진 느낌이다.외국인에 대한 극우파의 폭력이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자신들의 파이를 외국인들이 가로챈다고 느끼는 철부지들의 폭력도 문제지만 독일 국민들의 전반적 우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기자는 부럽기만 하다.

독일인들이 지금 조금 피곤함을 느낀다고 무슨 대수일까.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통일을 이미 10년 전에 이룩해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가고 있는 마당에…. 통일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독일인들이 이를 지불할 능력과 의지가 있다.누가 뭐래도 독일 경제는 통일 이후에도 유럽에서 가장 탄탄한 위치를 잃지 않았다.

요즘 만나는 독일인들은 지난번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화제로 10년 전과 비슷한 위로를 해준다.

"남북 정상이 만나고 이산가족이 만나는 걸 보니 한반도 통일도 멀지 않았다."그러면서 충고도 잊지 않는다.

"독일처럼 남북 통일도 순식간에 닥쳐올지 모른다.독일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유재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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