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칼럼] DJ 개혁의 정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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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金大中)정부가 임기 5년의 후반에 막 들어서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2년 반은 '개혁' 의 홍수 속에 흘러갔다. 金대통령은 정권출범 전부터 IMF위기 극복을 위해 재벌들과 5대 개혁을 합의한 것을 시작으로 금융.기업.공공.노사 등 4대개혁, 규제개혁, 교육개혁, 사회복지개혁, 그리고 정치개혁 등 모든 분야에서 온갖 개혁을 내걸었다.

***'준비안된 개혁' 후유증

지난번 개각을 하면서 金대통령은 미진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집권 1기의 개혁목표와 방향은 제대로 설정됐으며 그 성과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집권 2기는 그 바탕 위에서 개혁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에 쏟아지고 있는 사회 각층의 소리는 그런 주장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이른바 개혁대상들이었던 기업이나 기득권층은 개혁정책의 난맥상을 지적하고 있고, DJ개혁의 첨병노릇을 해왔던 진보세력들은 'DJ개혁의 표류' 를 공공연하게 비판하고 있다. 국민들은 이제 입에 발리다시피한 개혁소리에 신물을 내고 있으며 개혁이 몰고 온 혼선과 갈등에 개혁혼란증을 앓고 있다.

현재 몸살을 앓고 있는 의료개혁은 그야말로 '준비 안된 개혁' 의 대표적인 후유증이다. 의료전반의 시스템을 새로 짜야 할 장기적 문제를 제대로 된 청사진 하나 없이 시민단체들을 앞세워 어거지로 밀어붙인 어설픈 개혁논리가 오늘의 의란(醫亂)의 주범이다.

경제개혁은 더 모순적이다. 금융구조조정이 그 단적인 예다. 정부는 은행을 통폐합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금융노조가 들고 일어났다. 금융파업의 위협 속에 해결책이라고 나온 것은 인력과 기구의 감축 없는 구조조정이라는 해괴한 모습이다.

한쪽으로는 기업구조조정을 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노동자의 편을 들자니 정부는 관료 이코노미스트와 대기업, 노조와 시민단체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번은 이쪽에, 그러다가 말썽이 나면 저쪽에, 그리고 다시 진척이 잘 안되면 이번엔 목소리 큰 쪽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니 정책혼선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DJ 개혁노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좌인가 우인가, 진보인가 보수인가, 아니면 제3의 길인가.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합법화하고 노.정(勞政)연대로 사용자를 압박할 때는 진보적이지만 막상 금융과 기업구조조정은 미국 금융권의 눈치를 살피고 그 책임을 떠맡은 관료조직의 성향은 보수적이다.

그들이 충돌을 일으키면 그 갈등을 조정할 능력은 아무데도 없다. 민주당의 주축인 동교동세력은 개혁의 구호에 편승한 구정치세력에 불과하다. 민주당에 참여한 진보세력은 전문성이 없거나 실권이 없다. 당정협의는 당에 파견된 관료들이 주도하다 보니 개혁파의 목소리는 실낱같다.

아니, 그들 자신도 고난스런 개혁추진보다는 알량한 권력에 안주하고 만 것이 아닌가. 그러니 군사정권시절 탄압받은 민주화세력에게 보상을 해주겠다면서 박정희(朴正熙)기념관을 국고로 짓겠다는 모순이 버젓하게 시행될 수 있는 것이다. 인기를 끌만한 것, 표가 될만한 것은 모두 끌어넣겠다는 '백화점식 개혁' , 중심 없는 개혁이 정책혼선의 근본원인인 것이다.

가장 큰 정체성의 위기는 남북문제에서 나오고 있다. 정부가 6.15 공동선언을 바탕으로 추진 중인 통일정책들은 얼른 보기에 지금까지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인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비슷하지만 그 내용과 지향하는 가치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국민적 합의가 성공 열쇠

현재 정부가 취하고 있는 자세를 과도하게 밀고 나가면 자유민주주의의 이념보다는 민족통일이 더 우위에 서는 통일지상주의로 이어지는 결과가 빚어진다.

북한이 연공(聯共)애국인사라고 버젓이 주장하는 반체제인사가 이산가족 상봉단 단장으로 오는데도 이의 한마디 못달고, TV를 통해 '월북자가족의 고통' 을 강조하고, 범민련.한총련의 통일대축전을 허용한다면 도대체 체제의 정통성은 어디에 있으며 대북포용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정부가 남북교류의 성과에만 급급해 체제의 혼란을 방치한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면 이는 국가적 합의의 기본을 무너뜨리고 결국은 개혁에너지의 결집을 무산시키게 될 것이다.

이런 정체성 위기를 초래한 DJ 남북정책이 뒷날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IMF위기를 극복한 초기 성공의 담보가 모든 분야의 자기희생에 대한 국민적 합의였듯이 DJ개혁 2기도 그런 합의 없이는 성공을 보증할 수 없는 것이다.

김영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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