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도시·풍경] 여름속의 가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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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미 입추(立秋)도 지나고, 계절은 가을을 향해 가고 있다.

30℃를 웃도는 한낮의 찌는 더위는 여전하지만 저녁의 삽상한 바람속에 가을이 묻어난다.잠 못 이루며 뒤척이던 열대야(熱帶夜)며, 일상을 벗어던지고 내닫던 해변과 계곡….

여름은 이제 이런 것들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밀어내며 물러서고 있다. 그 여름의 끝을 잡고 뒤늦게 도시을 탈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또한 이젠 끝물. 때가 되면 어김없이 제 갈길로 가는 자연의 이치에 한낱 인간이 어찌 제동을 걸 수 있으랴.

이 세속의 도시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든다.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밤바람의 달짝지근한 향기를 한번 맡아보라. 야시장 인부들의 분주한 손놀림 속에도, '가을의 전령사' 국화를 다듬는 꽃집 아가씨의 흥얼거림에서도 가을은 배어 있다. 그렇게 가을은 우리 곁에 오고 있다.

*** #1 국화, 그 향기에 취해서

지난 10일 새벽 서울 양재동 꽃도매 시장을 찾았다. 꽃의 천국이다. 한창 소매상들이 모여 경매를 하는 시간, 새벽 2시다. 안개꽃.장미.달리아.백합.카네이션.라스.리시안시스….

낯 익은 것들부터 이름조차 생소한 꽃까지 별게 별게 다 있다.

그러나 지금 이 꽃시장의 주인공은 미당 서정주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은 꽃' 이라고 노래한 국화. 서늘한 바람과 함께 단아한 꽃을 피우는 국화에서 사람들은 으레 가을을 느낀다.

"찬바람이 불면 소국의 색깔이 더 예쁠겁니다." 국화 잎사귀를 다듬던 신세계꽃집 주인 신혜숙씨는 국화가 제색을 내려면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비닐하우스 등 농업기술의 발달로 식물들이 제철을 잊은 지 오래인데도, 본색(本色)의 진가는 역시 제철에 발휘된다는 사실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가을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모두들 피서를 떠나 손님도 별로 없고, 경제사정도 아직은 안풀렸는지 수입은 지난해만도 못해요. 아무래도 행사가 많은 가을이 벌이는 낫지요. "

어려운 살림살이엔 꽃은 사치일 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주름살진 경제 얘기가 나오자 삽시간에 국향(菊香)이 가시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어려운 때일수록 국화 향기로라도 시름을 달래보는 여유를 이 가을에 찾을 수는 없을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 #2 결실, 그 아름다운 땀

"우리 감곡 복숭아 맛은 전국에서 최고지유. " '요' 가 아니라 '유' 자로 약간 말꼬리를 늘여 빼는 게 영락없는 충청도 사람이다. 충북 음성에서 온 김재도라는 이 사내는 순박한 농사꾼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한여름 땀방울이 알알이 박힌 고향 감곡의 복숭아를 5t 트럭에 가득 싣고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서울청과에 왔다. 새벽 경매에 부치기 위해서다.

"올해는 그런대로 풍작이어서 소출은 좋은 편이었어요. 그러다보니 값은 예전만 못하네요. 비쌀 때는 10㎏ 한 상자에 10만원은 거뜬히 받았는데 지금은 3만~5만원 정도 해요. "

김씨가 박스를 뜯고 보여주는 '미백(美白)복숭아' 는 품종명 그대로 티없이 깨끗한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복숭아 농사로 버는 감곡면의 한해 수입은 1백억원이 넘어요. " 애지중지하며 자식을 키운 부모의 보람이 이보다 더할까.

복숭아 말고도 이곳 새벽 청과시장은 뭇 햇과일의 경연장같다. 저마다 제 상품을 자랑하는 플래카드가 담벼락에 주렁주렁 걸려있다.

'축 한방 인삼 사포닌 포도' '2000년 충북사과 출하 개시' 등등. 죄다 제값 다 받아 두둑한 지갑을 차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진짜 농군' 김씨에게도 이번 가을은 행복과 기쁨의 연속이길 기도한다.

*** #3 옷, 계절을 앞서는 '날개'

이번주 밀리오레.두타.남대문시장 등 서울시내의 대형 옷매장은 문을 걸어 잠그고 휴가를 떠났다. 어딜가나 '당일휴업' 간판이 걸려있었다.

남대문시장 정도가 그런대로 저녁 불을 밝히며 시장구실을 했다. 그런데도 옷가게는 이미 가을을 '입고' 있다.

남대문시장의 한 옷집 주인 박노식씨는 "휴가가 끝나는 다음 주부터는 시장 전체가 가을 옷 일색일 것" 이라고 했다.

이곳보다 좀 더 세련된 매장을 갖춘 L백화점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재래시장보다 훨씬 유행에 민감하기 때문에 이미 7월 중순부터 가을옷으로 디스플레이를 바꿨다고 한다.

한 유명 여성브랜드의 점장(店長) 송영숙씨는 "해외여행이 늘면서 진작부터 옷에도 '계절파괴' 가 있었다" 고 말했다.

그녀에게 올 가을 유행할 것같은 색과 스타일을 물었더니 청산유수다.

"실크 느낌을 주는 광택있는 소재와 와인색이 인기를 끌 것 같아요. " 소비자들의 취향을 두루 꿰고 있는 프로의 모습이다.

마침 곧 개학을 앞둔 대학 3학년생 딸을 데리고 나온 주부 한금자씨는 뒤진 계절감각 때문에 낭패를 보고 있다.

"개학 기념으로 딸에게 원피스 한벌 사주려고 했는데…." 아무튼 이래저래 옷값을 묻던 한씨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래졌다."원피스 한벌에 45만원." 학생에게 입히기에는 왠지 부담스럽다며 한씨는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다 가을을 맞이하는 우리네 이웃들의 정겨운 모습이다.

이제 곧 우리곁으로 성큼 다가설 가을. 뜨거웠던 여름의 열기가 세상 모든 것에 송송 배어 그 가을이 모두에게 풍성함을 전해주길….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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