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기획-세계의 한복판으로 <5> 광주 민주화운동 30년-어둠을 넘어 빛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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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공동체, 일명 ‘광주 코뮌’을 이뤘던 1980년 5월 은 ‘시민 모두를 위한 나라’를 꿈꾸었던 한국 현대사의 실험이었다.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였던 이창성씨가 2008년 5월 펴낸 사진집 『28년 만의 약속』에 실린 시민군의 모습.

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을 각별하게 맞이하는 사람이 있다. 빛고을 광주 시민들에게 큰 빚을 졌다며 자신을 자책하던 그 남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1980년 5월, 전남 광주에 계엄군과 함께 들어갔던 그는 이제 사진작가가 되어 망월동에 묻힌 영혼들을 세상으로 불러낸다. 어둠을 넘어 빛으로 거듭난 그의 육성으로 5·18 30년의 뜻을 묻는다.

국화꽃은 시들고 하늘은 어두운데 면사포를 쓴 신부는 웃음을 베어 물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5·18 묘역. 한 남자가 밤 도와 묘지를 서성이다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본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태어나 결혼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엄마가 됐던 한 영혼의 슬픔이 묵직하게 그의 가슴을 후벼 판다. 그가 무덤들을 돌아다닐 때 영정 사진 속 넋들이 말을 걸어왔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기운이었다. 그렇게 1년여 망월동 순례를 한 그 남자는 사진기를 들고 돌아왔다. 이념의 무게나 역사적 소명은 없었다. 온몸을 저미던 그 기운 때문이었다.

“밤에 그들 옆에 주저앉아 있으면 빛의 세계에 있을 때는 거론되지 않던 것들이 다 들려요.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을 수 있죠. 광주가 한국 현대사에서 했던 역할이 어둠 아닐까요.”

사진작가 이상일(54)씨는 “80년 광주에서 나는 어둠의 세계가 오히려 더 진실할 수 있다는 걸 봤다”고 말했다. 이씨는 특수부대의 일원으로 5월 27일 전남도청 작전에 투입됐다. 총칼 대신 사진기가 그의 무기였다. 주요 공격 좌표를 미리 사진 찍고 진압 뒤 결과를 기록하는 일이었다. 무감각하게 명령을 수행하던 그는 도청에서 아들의 주검을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 순간 제 몸이 얼어붙었어요.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13살 때 가출하고 나서 한 번도 찾아가보지 못한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 ‘아 내가 알았다고 여겼던 건 관념일 뿐이었구나’ 깨달음이 왔습니다. 죽은 자식을 껴안고 통곡하는 어머니의 영상이 뇌리에 박혀 중요한 때마다 떠올랐어요. 광주가 제 생의 전환점이 된 거죠.”

제대한 뒤 광주가 너무 궁금했지만 망월동을 찾기까지 두려움을 떨쳐내느라 고생했다. 막차를 타고 가다가 망월동 바로 앞마을에서 내려 어두워진 뒤 걸어 들어갔다. 그가 찍은 망월동 연작이 모두 밤을 배경으로 한 까닭이다. 영정 하나하나가 들려주는 얘기를 듣고 사진을 찍다 보면 부옇게 날이 밝아왔다. 아침 첫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이상일씨가 계엄군에서 사진작가로 인생의 대전환을 이루게 한 ‘망월동’ 연작 중 한 작품. 은염프린트, 100ⅹ100㎝, 1984~2000년. 대낮에 망월동 묘역에 들어가기가 두려웠던 이씨는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워진 밤에 숨듯 찾아가 묘지를 돌며 영정 속 영혼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지금도 서너 달에 한 번 망월동에 갑니다. 세상이 온통 빛을 좇아 달려가는지라 때로 떠밀려난 존재들, 잊혀진 가치들 같은 어둠의 세례가 필요하거든요. 그들이 주는 기운을 받아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거죠.”

이상일씨는 요즈음 부산 범어사에 머물며 새벽 3시에 일어나 사진을 찍는다. 같은 어둠이지만 새벽 3시는 만물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빛의 시작 지점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이는 빛의 세계를 포착하고 있다. 어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우쳐준 광주에 진 빚을 그는 빛의 사진으로 갚아나간다.

정재숙 선임기자

◆이상일=1956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경북산업대와 중앙대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 최우수 기획전상, 2009년 동강국제사진제 동강사진상을 받았고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초대전 등 개인전을 10여 차례 열었다. 경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를 거쳐 지금은 부산 범어사에서 살며 작업하고 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30년을 어떻게 볼까

시민 모두 위한 나라 만들려 해
한국 현대사의 빛나던 순간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교수)=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 중 ‘운동의 정치’의 극점을 이룬 실례다.

1980년 5월 그 순간에는 처절히 패배했지만 문민 지배의 전환점을 이룬 승리의 역사로 평가받는다. 분단체제의 숙명 속에서 팽배한 군 쿠데타의 위험을 잠재우는 최후의 방파제 구실을 해낸 것이다. 지리멸렬한 현실 정치를 생각하면 80년 5월 열흘 동안 시민공동체를 이뤘던 광주는 한국 정치 미래의 한 모델이다. 한국적인 공화국을 ‘시민 모두를 위한 나라’로 여긴다면 5·18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에 폭죽처럼 빛나는 순간이다.

내 아들(고 윤상원씨)을 미화하는 것은 싫다
아들이 했던 일, 그대로만 인정을

◆윤석동 (5·18 광주민주화운동 대변인 고 윤상원씨의 부친, 전 5·18유족회 회장)=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고향 집이 아들의 생가다. 2005년 5월 ‘윤상원열사 기념관’으로 바꾸었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5·18, 그 참뜻이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퇴색한 느낌이다.

5·18 정신은 아들이 1980년 5월 27일 도청 진압 이틀 전에 했던 외신 회견에서 밝혔던 내용 그대로다. 당시 내 아들은 이 땅에 민주·평화·통일의 가치 실현을 호소하며 목숨을 바쳤다. 내 아들에 대해 없는 사실을 더 보태 미화하는 것은 싫다. 앞으로 아들이 했던 일 그대로만 우리 사회에서 인정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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