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공동체, 일명 ‘광주 코뮌’을 이뤘던 1980년 5월 은 ‘시민 모두를 위한 나라’를 꿈꾸었던 한국 현대사의 실험이었다.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였던 이창성씨가 2008년 5월 펴낸 사진집 『28년 만의 약속』에 실린 시민군의 모습.
국화꽃은 시들고 하늘은 어두운데 면사포를 쓴 신부는 웃음을 베어 물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5·18 묘역. 한 남자가 밤 도와 묘지를 서성이다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본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태어나 결혼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엄마가 됐던 한 영혼의 슬픔이 묵직하게 그의 가슴을 후벼 판다. 그가 무덤들을 돌아다닐 때 영정 사진 속 넋들이 말을 걸어왔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기운이었다. 그렇게 1년여 망월동 순례를 한 그 남자는 사진기를 들고 돌아왔다. 이념의 무게나 역사적 소명은 없었다. 온몸을 저미던 그 기운 때문이었다.
“밤에 그들 옆에 주저앉아 있으면 빛의 세계에 있을 때는 거론되지 않던 것들이 다 들려요.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을 수 있죠. 광주가 한국 현대사에서 했던 역할이 어둠 아닐까요.”
“그 순간 제 몸이 얼어붙었어요.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13살 때 가출하고 나서 한 번도 찾아가보지 못한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 ‘아 내가 알았다고 여겼던 건 관념일 뿐이었구나’ 깨달음이 왔습니다. 죽은 자식을 껴안고 통곡하는 어머니의 영상이 뇌리에 박혀 중요한 때마다 떠올랐어요. 광주가 제 생의 전환점이 된 거죠.”
제대한 뒤 광주가 너무 궁금했지만 망월동을 찾기까지 두려움을 떨쳐내느라 고생했다. 막차를 타고 가다가 망월동 바로 앞마을에서 내려 어두워진 뒤 걸어 들어갔다. 그가 찍은 망월동 연작이 모두 밤을 배경으로 한 까닭이다. 영정 하나하나가 들려주는 얘기를 듣고 사진을 찍다 보면 부옇게 날이 밝아왔다. 아침 첫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이상일씨가 계엄군에서 사진작가로 인생의 대전환을 이루게 한 ‘망월동’ 연작 중 한 작품. 은염프린트, 100ⅹ100㎝, 1984~2000년. 대낮에 망월동 묘역에 들어가기가 두려웠던 이씨는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워진 밤에 숨듯 찾아가 묘지를 돌며 영정 속 영혼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이상일씨는 요즈음 부산 범어사에 머물며 새벽 3시에 일어나 사진을 찍는다. 같은 어둠이지만 새벽 3시는 만물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빛의 시작 지점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이는 빛의 세계를 포착하고 있다. 어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우쳐준 광주에 진 빚을 그는 빛의 사진으로 갚아나간다.
정재숙 선임기자
◆이상일=1956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경북산업대와 중앙대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 최우수 기획전상, 2009년 동강국제사진제 동강사진상을 받았고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초대전 등 개인전을 10여 차례 열었다. 경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를 거쳐 지금은 부산 범어사에서 살며 작업하고 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30년을 어떻게 볼까
시민 모두 위한 나라 만들려 해
한국 현대사의 빛나던 순간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교수)=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 중 ‘운동의 정치’의 극점을 이룬 실례다.
1980년 5월 그 순간에는 처절히 패배했지만 문민 지배의 전환점을 이룬 승리의 역사로 평가받는다. 분단체제의 숙명 속에서 팽배한 군 쿠데타의 위험을 잠재우는 최후의 방파제 구실을 해낸 것이다. 지리멸렬한 현실 정치를 생각하면 80년 5월 열흘 동안 시민공동체를 이뤘던 광주는 한국 정치 미래의 한 모델이다. 한국적인 공화국을 ‘시민 모두를 위한 나라’로 여긴다면 5·18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에 폭죽처럼 빛나는 순간이다.
내 아들(고 윤상원씨)을 미화하는 것은 싫다
아들이 했던 일, 그대로만 인정을
◆윤석동 (5·18 광주민주화운동 대변인 고 윤상원씨의 부친, 전 5·18유족회 회장)=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고향 집이 아들의 생가다. 2005년 5월 ‘윤상원열사 기념관’으로 바꾸었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5·18, 그 참뜻이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퇴색한 느낌이다.
5·18 정신은 아들이 1980년 5월 27일 도청 진압 이틀 전에 했던 외신 회견에서 밝혔던 내용 그대로다. 당시 내 아들은 이 땅에 민주·평화·통일의 가치 실현을 호소하며 목숨을 바쳤다. 내 아들에 대해 없는 사실을 더 보태 미화하는 것은 싫다. 앞으로 아들이 했던 일 그대로만 우리 사회에서 인정해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