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금융시장 야생마’에 첫 고삐 … 20년 정도는 유지될 것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47호 28면

“남보다 많은 이익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제어하려는 열망이 커지고 있다.”
제프리 가튼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지난해 10월 중앙SUNDAY와 전화통화에서 한 말이다. 미국·유럽에서 일고 있는 금융개혁에 대한 촌평이다. 법규의 힘으로 남보다 더 많은 이익(초과 수익)을 거두려는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단순히 금융인들의 보너스를 제한하자는 수준이 아니다. 머니게임 자체를 법규의 틀 안에 가두자는 요구다.

올해 등장할 ‘글로벌 금융 규제 체제’의 운명은

여론의 방향이 정해지면 정치가 뒤따른다. 미국·영국·유럽연합(EU)의 정치인들은 ‘금융개혁’을 높이 부르짖고 있다. 그들은 다양한 법안들을 제출했다. 미국 하원에는 의회가 중앙은행 회계 감사를 벌이는 법안이 제출돼 있다. 일부 나라는 한 걸음 더 나갔다. 법안 단계가 아니라 아예 행동에 나섰다. 브라질과 러시아 등은 자기 나라를 드나드는 달러 자금에 대해 자본거래세(토빈세)를 물리겠다고 선언했다. 세금을 물려 핫머니가 요동치는 걸 막겠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체제 전문가인 배리 아이켄그린 미국 UC버클리대 교수는 “위기 직전까지 자명한 진리로 여겨진 ‘중앙은행 독립’이나 ‘자유로운 자본 이동’의 가치가 의심받고 있다”며 “위기 직후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금융감독기구 통합 논의 활발
대신 새로운 논리가 힘을 얻고 있다. ‘정부가 나서 금융시장 리스크를 관리하는 일이 선(善)’이라는 논리다. 이에 맞춰 미국·유럽 등은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없던 고삐를 매다는 일로 분주하다.

위기의 진앙인 미국에서는 분산됐던 감독기구를 하나로 아우른 조직이 탄생할 듯하다. 내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상·하원이 모두 통합 감독기구 신설 법안을 내놓고 있다. 통합 감독기구가 출현하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연방저축기관감독청(OTS) 등을 지휘·통제한다. 또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과 금융 안정성을 살피는 기구도 새로 만들어질 듯하다.

EU는 전체 회원국 금융 감독 정책을 지휘하고 조율하는 시스템리스크위원회(ESRB)를 설치할 예정이다. 위원회는 회원국에 이런저런 안전장치를 마련하라고 권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기를 조기에 경보한다. 또 역내 금융회사를 직접 감독하는 금융감독유럽시스템(ESFS)을 따로 두기로 했다.

영국에서는 금융감독청(FSA)·중앙은행·재무부가 좀 더 많은 권한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재무부는 이른바 ‘금융안정위원회’를 설치해 재무장관이 위원장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앙은행은 금융회사 검사 권한을 더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금융감독청은 현재보다 더 강한 힘을 가져야 위기를 예방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영국 감독 체제가 미국보다 먼저 통합됐다”며 “기존 틀을 흔들기보다는 권한을 키우거나 새로 만드는 단계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영국과 비슷한 모습이다.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일보다 ‘어느 기관이 어떤 권한을 갖는가’를 두고 줄다리기가 한창이다. 한국은행(BOK)은 금융회사에 대한 직접 조사권을 요구하고 있다. 반대 목소리가 만만찮아 한국은행 바람대로 될지 아직은 미지수다.

헤지펀드와 파생상품 등 이른바 ‘금융시장의 야생마’에 고삐를 채우는 일은 조직 정비보다는 수월하게 진행될 전망이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유럽과 미국의 입장 차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유럽이 헤지펀드와 파생상품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이 동의하지 않아 야생마 길들이기가 시작되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은 우선 정보 공개라는 고삐를 채울 요량이다. 헤지펀드 등록제와 파생상품 거래를 감독 당국에 보고하도록 하는 것이다. 시장이 충분한 정보를 알면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논리에 따른 대책이다. 계획대로 진행되면 ‘금융시장 야생마’의 목에 처음으로 방울이 달린다.

금융 슈퍼마켓 10년 만의 대수술
미 금융산업현대화법(그램-리치-브릴리법)이 제정된 1999년 11월 12일 월가는 환호성을 올렸다. 약 20년간 이어진 장기전이 일단락됐기 때문이다. 33년에 만들어진 시중-투자 은행 분리법(글래스-스티걸법)을 폐지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월가는 거대 금융그룹을 만들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씨티그룹이 정식 탄생했다. 이른바 ‘금융 수퍼마켓’이 줄줄이 출현했다. 여러 금융 수단을 뒤섞어 변종 증권을 만들어 내는 일도 본격화했다. 전문가들은 미 금융산업 현대화법을 ‘규제 완화의 절정’이라고 평가했다. 그 순간 월가는 더 이상 규제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딱 10년이 흐른 뒤인 2009년 시계추는 정확하게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닥터 둠’ 뉴욕대 누리엘 루비니(경제학) 교수는 “당시 관에 담아 묻고 봉인까지 한 규제가 다시 깨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주요 국가들의 금융계는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이 지금은 부치는 듯하다. 천문학적인 공적자금, 금융권의 거액 보너스 잔치 등에 분노한 대중에게 금융계의 시장 자유와 효율성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힘의 균형이 깨진 셈이다. 2010년 시장을 규제하기 위한 법규 제정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미 의회는 올 3월 상·하원 합동 금융개혁 법안을 만들 예정이다. 일부 공화당 의원의 반발 등으로 조금 늦어질 수는 있지만 올 상반기 안에 금융개혁법이 만들어질 전망이다.

가튼 교수는 “규제 완화→위기→규제 강화로 이어지는 사이클의 일부”라고 말했다. 효율성 저하를 해결하기 위해 규제를 풀었는데 위기가 발생해 법규의 힘에 기댄다는 것이다. 가튼 교수는 1910~20년대 자유방임이 대공황으로 이어졌고 30년대 금융시장 규제가 강화된 것을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자유방임과 규제 시대가 20년씩 이어졌다”며 “2010년에 새로운 금융 법규가 만들어지면 이후 20년 정도는 힘을 발휘할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가이트너 “규제의 아비트리지 사라져야”
미 재무장관 티머시 가이트너는 지난해 11월 “규제의 아비트리지(Arbitrage)를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마다 규제의 정도가 달라 금융회사들이 법규가 느슨한 나라로 이동하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미국이 금융시장을 엄격히 규제한 60~70년대 미 금융회사들이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한 런던으로 이동했다. 그 여파로 자본이 대거 미국을 떠났다.

규제의 아비트리지를 막기 위한 길은 열려 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은 지난해 미 피츠버그에서 열린 회의에서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글로벌 금융규제를 통일시키기로 합의했다. 전문가들은 헤지펀드·파생상품 규제가 가장 먼저 글로벌 법규로 만들어질 것으로 봤다. 금융 소비자 보호 규정도 단일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은행과 보험회사, 증권사의 자본 규모 등에 대한 규정도 하나로 통일될 것으로 내다봤다.

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의 모리스 골드스타인 수석연구원은 “G20 회원국들이 합의하면 역사상 처음으로 ‘글로벌 금융 규제체제(Global Financial Regulatory Regime)’가 탄생한다”고 말했다. 분수령은 올 11월 서울 G20 회의가 될 가능성이 크다. 6월 캐나다에서 G20 1차 회의가 열리지만 이때까지 각국 내부 정비가 다 이뤄지는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글로벌 규제체제가 성공할까? 전문가들은 비관적이다. 초과 수익을 향한 욕망을 법규의 힘으로 제어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나기 십상이었다. 효율성이 떨어져 성장률 저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가튼 교수의 말대로 결국 규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에 몰릴 가능성이 크다. 또 금융 규제는 초과 수익을 노린 혁신 때문에 무력화되기도 한다. 9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C 머튼 하버드대 교수는 “남보다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한 금융 혁신은 기존 법규의 틈이나 약점을 공격한다”며 “이런 혁신이 하나씩 성공하면 규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번 금융개혁 움직임은 ‘효율성 저하→규제 완화’로 이어지는 또 다른 사이클의 시작인 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