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호장룡' 홍보차 내한한 리안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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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와호장룡(臥虎藏龍)' 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

한여름 대목을 노려 '액션-스펙터클' 을 내세운 영화들이 극장가를 한차례 쓸고간 뒤에서야 간판이 걸리기 때문이다(내달 12일 개봉).

조무래기 총잡이들이 노략과 분탕질로 휘저어 놓고 떠난 마을에 고독한 표정으로 들어서는 서부의 사나이처럼, '와호장룡' 은 올해 오락영화의 '왕중왕' 이다.

처음 5분과 마지막 5분의 화려한 액션을 빼면 지루하게 이야기를 엿가락처럼 늘어 뜨린 '미션임파서블 2' 나, 특수효과가 그런대로 사 줄만하고 그나마 한국영화니까 봐 주는 '비천무' 를 생각하면 '와호장룡' 의 지각이 더욱 아쉽다.

저우룬파(周潤發).양쯔충(楊紫瓊).장쯔이(章子怡)등 중국계 스타 배우가 포진한 '와호장룡' 은 무협멜로물의 진수를 보여준다.

무대에서 노니는 무희처럼 주인공들의 공중 무술은 춤을 닮았고 성룡식 액션에서조차 비장미가 느껴질 만큼 비련의 사연은 애달프다.

동성애자 아들과 부모의 갈등을 코믹하게 다룬 '결혼 피로연' , 중국 전통음식의 대가인 아버지와 세 딸이 티격대는 '음식남녀' 를 거쳐 '센스 앤 센스빌리티' (제인 오스틴 원작) '아이스 스톰' '라이드 위드 데블' 등 대만 출신이면서도 서양 이야기를 능숙하게 다뤄온 리안(李安)감독에게 이번 작품은 전작들에 비해 가장 중국적이다.

지난 20일 내한한 그에게 던진 첫 질문은 "동양인으로서 어떻게 서양 이야기를 잘 다룰 수 있었는가" 였다.

"대학 시절이후 미국에서 줄곧 생활해 왔지만 특별히 내가 서양인들의 사고나 풍속을 속속들이 잘 아는 건 아니다.

다양한 장르를 만들어오면서도 내 영화에는 늘 중심 테마가 있었는데 그건 사회 속에서 인간 관계의 변화를 포착하는 거였다.

영화마다 질감만 다를 뿐 이 핵심은 바뀌지 않았다. 이런 주제에 맞는 소재를 찾고 최선을 다하다보니 서양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중국 요리를 할 때보다 서양 음식을 만들 때 더 조심하듯히 그렇게 주의하다보면 더 세심하게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역시 동양인이라 어쩔 수 없어' 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7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의 해체를 다룬 '아이스 스톰' 이나 남북전쟁을 다룬 '라이드 위드 데블' 에 대해 특히 그랬다. 역사해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국외자이기때문에 역사나 현실을 해석할 때 그들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 동양인으로서 할리우드에서 생존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할리우드는 시스템이 잘 돼 있다. 인재도 많고 기술도 뛰어나다. 그러나 유연성은 떨어진다. 예컨대 주인공이 나뭇잎을 집는 장면 하나 찍는데도 60대의 트럭이 동시에 움직인다. 스태프들의 마인드도 다르다. 미국 스태프들은 자기 일을 한다는 의식이 강한 반면 대만 인력들은 감독을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만에서의 감독 일은 미국보다 세 배정도 더 힘든 것 같다. 시스템만 익히면 미국에서의 작업도 그다지 어렵진 않다."

- 한국의 일부 감독도 할리우드에서 손짓을 받고 있다. 조언을 한다면.

"무엇보다 할리우드식 게임의 규칙을 익혀야한다. 영어가 능숙해야 하고 스토리나 영화의 구성 등에서 이들의 논리를 따를 줄 알아야한다. 여기에 자기만의 독창성을 가미할 수 있다면 일급이다.

또 '나는 한국감독이다' 라는 식의 민족주의적인 사고에 메이는 것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모든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영화를 찍는 게 중요하다. 나는 미국에서 일할 때 제작의 어려움보다 문화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영화를 완성하고 난 뒤 다들 칭찬을 하는 데 이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할 지, 아직도 잘 모른다.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라 파티에 가서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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