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남북정상회담, 그후 한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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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 달이다. 분단 55년의 벽을 깨고 남과 북의 최고 당국자가 만나 한 편의 드라마를 연출한 지 꼭 한 달이 됐다.

그러나 그 한 달 동안 실제 우리가 겪은 것은 국민만 죽어난 채 미봉된 '의료대란' 과 공적자금이란 그럴 듯한 이름으로 둔갑한 국민혈세를 10조 이상 새로 투입해 모두 35조로 입막음해야 할 숙제로 남은 '금융혼란' 의 가슴앓이뿐이었다.

민생과 경제는 신트림을 하는데 새로 개원한 국회는 여전히 무기력한 채 관념의 유희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말만 바꿨지 거짓말은 안했다" 는 특정 당 총재 직함의 총리 후보에게서 '서리' 딱지를 떼주는 일을 '최초의 공직자청문회' 라는 이름 아래 하는데 몇날 며칠을 허비했다.

총선에서 참패한 정당이 총리뿐 아니라 국회부의장 자리를 거머쥐게 만들고 마침내는 원내교섭단체 정족수를 그들 입맛에 맞게 하향조정해 달라는 정치적 '몽니' 를 부려도 어리광처럼 받아만 줬다.

통일협상의 전후맥락도 옳게 짚지 못하면서 애꿎게 헌법 제3조를 고치자며 때 아닌 개헌론이 나오고 여기에 한 술 더 떠 16대 국회 최초의 대정부 질의에서부터 대통령 4년 중임제 등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논의를 음식점 메뉴처럼 내놓았지만 거기에는 매맞아 죽더라도 관철해 보겠다는 신념도, 확신도, 의지도 결여돼 있었다.

일문일답을 하라고 맞세워도 보았지만 여전히 대정부 질의의 초점은 흐려져 있고 이해관계의 물타기로 맹맹하기 그지 없었다.

장관들은 공.사석을 막론하고 '김정일 주(酒)' 에 취해 자기만이 알고있는 은밀한 방북 에피소드를 대통령과의 친밀도 과시 내지 권력지수인 양 떠벌리고 남북문제가 만사해결의 도깨비 방망이인 것처럼 자만했다.

특히 입 여는 것이 무서운 통일원 장관은 가는 곳마다 '김정일 화찬(話讚)' 과 방북 무용담을 늘어놓고 스스로 그것을 주워담지 못해 우왕좌왕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 와중에 국군포로의 존재가 말소되고 이산가족이 당장 남북 어디에서나 동거할 수 있는 것처럼 돼버렸다.

청와대는 의료대란과 금융혼란의 와중에도 여전히 남북카드 하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듯 김정일의 답방 가능성과 그 일자에 촉각을 곤두세워 8.15방문설에서 연내 방문설, 마침내는 대통령 스스로 내년 봄 김정일의 서울행을 예시하는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남북한 최고 당국자의 악수장면을 담은 화보가 성급하다 못해 조급하게 교과서에 실리게 됐다. 아직 익지도 않은 생쌀을 아이들 도시락에 담아주는 꼴이었다.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 북한 당국은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의 귀환이 왜 늦어지느냐고 아우성치고 남북 적십자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방북한 우리측 '풀' 기자를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게 했다.

마침내 북한 당국은 특정 언론사에 대한 '폭파 운운' 하는 망발을 재연하더니 급기야 야당 총재의 실명을 거명하며 '놈' 자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정일이 재미동포 언론인과 인터뷰를 하며 전직 대통령 초청건에 관해 언급할 때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는 식의 교묘한 편가름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지난 한 달 동안 우리는 유치한 국회, 술취한 정부, 그리고 표류하는 국가정체성 속에서 어디에 기준을 둬야 할지, 어디를 향해 서 있어야 할지조차 몰라 우왕좌왕했다.

국민들은 소년소녀가장처럼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너무 소란했다. 너무 헤맸다.

총리는 이것이 과도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결코 과도적인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다. 한 달은 우리에게 국가의 근본을 다시 생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갈 방향과 갈 길을 분명히 하자. "오늘 나의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이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기억하자. 그 시간의 보복을 두려워 하자.

정진홍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커뮤니케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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