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엔 악보, 연극엔 희곡이 있듯이 영화에는 시나리오가 있다. 지휘자가 악보에 자신의 해석을 담고 영화 감독은 시나리오에 의존해 자기 세계를 영상에 담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는 영화 이전에 존재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색다른 논쟁이 일고 있다. 최근 출간된 '영화예술' 가을호는 '시나리오(각본)는 영화 이전에 존재하는가, 영화가 완성된 뒤에 존재하는가' 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논란은 올해 초 마이니치(每日)신문이 주최하는 마이니치영화 콩쿠르에서 'M/OTHER' 가 시나리오상을 수상한 데서 발단했다.
수와 노부히로 감독의 'M/OTHER '는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아시아독립영화상을 탄' 화제작. 문제는 이 영화가 애초에 시나리오 없이 촬영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인물들의 대사는 전혀 없이 상황을 간단히 적은 '구성대본' 만을 갖고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M/OTHER' 는 이혼한 남자와 동거녀 사이에 어느 날 남자의 어린 아들이 끼여들면서 일어나는 남녀간의 미묘한 갈등을 다루고 있다.
감독은 촬영장에서 두 주연 배우가 느끼는 감정의 흐름을 존중하면서 그 때 그 때 대사를 만들어냈다.
심사위원들은 "주인공들의 대사와 연기는 재즈적인 즉흥성에 가깝다. 이들은 인물의 내면을 깊이 있게 끌어내 리얼리티를 살리는 데 성공했다.
감독과 주연 배우가 시도한 새로운 방법과 그 실천을 높이 평가한다" 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영화예술' 편집진은 "사전에 활자화된 시나리오가 없었던 영화에 대해 각본상을 준 것은 심사위원들의 나태와 불찰의 결과" 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수와 감독은 "시나리오란 촬영 현장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하며 그렇기 때문에 문자로 된 대본만이 시나리오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 반박했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영화가 완성된 뒤의 대사와 장면 설정 등을 보고 시나리오상을 줄 수 있다" 는 측과 "촬영 과정에서 감독이 손질하는 것은 연출의 영역에 속한다" 는 측이 맞섰다. 시나리오 작가들 중에도 수상에 동조하는 입장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한 작가는 "내가 쓴 각본을 감독이 완전히 개작해도 상관없다" 며 시나리오에 대한 감독의 재량을 폭넓게 인정해 주었다.
아무튼 이번 논쟁은 종합예술로서의 영화가 가진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
이영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