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적 대사로 촬영한 영화 각본상 수상 논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음악엔 악보, 연극엔 희곡이 있듯이 영화에는 시나리오가 있다. 지휘자가 악보에 자신의 해석을 담고 영화 감독은 시나리오에 의존해 자기 세계를 영상에 담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는 영화 이전에 존재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색다른 논쟁이 일고 있다. 최근 출간된 '영화예술' 가을호는 '시나리오(각본)는 영화 이전에 존재하는가, 영화가 완성된 뒤에 존재하는가' 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논란은 올해 초 마이니치(每日)신문이 주최하는 마이니치영화 콩쿠르에서 'M/OTHER' 가 시나리오상을 수상한 데서 발단했다.

수와 노부히로 감독의 'M/OTHER '는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아시아독립영화상을 탄' 화제작. 문제는 이 영화가 애초에 시나리오 없이 촬영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인물들의 대사는 전혀 없이 상황을 간단히 적은 '구성대본' 만을 갖고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M/OTHER' 는 이혼한 남자와 동거녀 사이에 어느 날 남자의 어린 아들이 끼여들면서 일어나는 남녀간의 미묘한 갈등을 다루고 있다.

감독은 촬영장에서 두 주연 배우가 느끼는 감정의 흐름을 존중하면서 그 때 그 때 대사를 만들어냈다.

심사위원들은 "주인공들의 대사와 연기는 재즈적인 즉흥성에 가깝다. 이들은 인물의 내면을 깊이 있게 끌어내 리얼리티를 살리는 데 성공했다.

감독과 주연 배우가 시도한 새로운 방법과 그 실천을 높이 평가한다" 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영화예술' 편집진은 "사전에 활자화된 시나리오가 없었던 영화에 대해 각본상을 준 것은 심사위원들의 나태와 불찰의 결과" 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수와 감독은 "시나리오란 촬영 현장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하며 그렇기 때문에 문자로 된 대본만이 시나리오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 반박했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영화가 완성된 뒤의 대사와 장면 설정 등을 보고 시나리오상을 줄 수 있다" 는 측과 "촬영 과정에서 감독이 손질하는 것은 연출의 영역에 속한다" 는 측이 맞섰다. 시나리오 작가들 중에도 수상에 동조하는 입장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한 작가는 "내가 쓴 각본을 감독이 완전히 개작해도 상관없다" 며 시나리오에 대한 감독의 재량을 폭넓게 인정해 주었다.

아무튼 이번 논쟁은 종합예술로서의 영화가 가진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

이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