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10대들 소설 'CRAZY ' 에 열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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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세계 27개국 베스트셀러/열여섯 살 소년의 꿈과 호기심, 비밀과 사랑' . 장편소설 'CRAZY ' 앞표지의 이 카피는 한마디로 '별로' 다.

뻔한 상투어 나열이 식상한데다가 '꿈과 사랑' 식의 근거없는 분칠이 개운치 않기 때문이다.

분명 어른들 시선이 만든 '포장' 이겠거니 싶은데, 'CRAZY' 는 외려 반대쪽이다.

'젊음〓싱싱한 꿈나무' 이기는 커녕 '세상이 뭣같다' 고 느끼는 지구촌 10대들이 들려주는 '성장통(痛)의 아우성' 이다.

불만투성이 세상 속에서 살아있다는 짜릿한 실감을 찾기 위해 '미친 짓' 을 즐기는 유럽 10대들의 좌충우돌이 이 텍스트이다.

그런 면에서 하인리히 뵐이 소속된 독일의 유명출판사 키펜호이어에서 지난해 출간된 이 책이 세계적 규모의 인기몰이와 함께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1951년 초판 출간)과 비교되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셀린저 소설은 금세기 중반이후 심각해지고 집단화된 10대들의 삐뚜름한 정서를 비속어에 담은 반항적인 소설.

단 '호밀밭' 이 셀린저 나이 30대 초반에 발표한데 비해 'CRAZY' 는 그 자신이 10대인 장애인 소년 벤야민 레버트(18)의 자전 작품.

그만큼 상대적으로 리얼할 수 밖에 없고, 탈(脫)학교, 학교붕괴 등 흉흉한 '학교 괴담' 속의 국내 10대들을 해독하기 위한 '블랙 박스' 일 수도 있다.

거칠게 말해 'CRAZY' 는 '몸살을 앓는 10대들의 자화상' . 스토리는 좌반신 마비증세의 장애아 주인공 '베니' 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의 누나는 자유분방한 레즈비언이고, 부모는 사이가 좋지않다. 소설 속에서 그의 아빠는 부인 몰래 '젖가슴 큰 여자' 를 따로 만나는 것으로 암시된다.

베니? 부모 몰래 말보로를 즐겨피우는 그는 대입시험 준비를 위해 여러 학교 전전 끝에 '노이젤렌 기숙사' 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죽이 맞는 패거리 6인방과 함께 놀아난 몇개월의 일탈기록이 이 소설이다.

이들 패거리는 자신이 호모라고 속여 성상담을 받는 친구를 영웅시하는 치기를 보이기도 하고, '뭣 같은 세상에 여자애들 하나만은 죽여준다' 며 여자킬러를 자처하기도 한다.

여학생 기숙사에 쳐들어간 6인방이 질펀한 맥주파티와 함께 화장실에서 섹스행각까지 벌이고, 나중에는 시내 스트립바에까지 진출해 '세상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내용이 주종이지만, 서술은 대체로 드라이하다.

아니 요즘말로 '쿨' 하다. 유럽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거룩한 체 하지 않은 자기들 이야기' 라는 공감,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기들 말투들에 대한 '느낌의 공유'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을 해독하는 키워드는 단연 'CRAZY' . 독일어 원제도 그렇고, 우리말 번역도 영어 그대로를 썼다.

무슨 뉘앙스일까. '미친' '제정신이 아닌' 등 영어 뜻과 상관없이 6인방은 이말을 '멋지다' '짜릿하다' 는 식의 반어법으로 사용한다.

어른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 그러나 그들만의 은어이자 유머감각을 살린 역설의 어휘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라. 당신 어른들에게도 10대 시절 젊은 세상이 마냥 즐겁기만 했던가□ 젊음이 버거워 몸부림친 기억은 없었던가? 'CRAZY' 는 변화하는 시대 변모하는 그들을 다시 읽게 해주는 진지한 텍스트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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