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종이책의 마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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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선물로 받지 않고 인간의 정신으로 창조해낸 수많은 세계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은 책의 세계다."

헤르만 헤세의 이 말을 실감나게 하는 현상이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지난 8일 세계에서 동시 판매되기 시작한 '해리 포터' 시리즈 제4권을 사려고 세계의 주요 서점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미국에서만 3백80만권이 눈 깜짝할 사이에 팔려 초판이 매진됐다.

7백34쪽으로 제 가슴만큼 두꺼운 책을 안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인터넷과 영상, 전자 책에 밀리며 '종이 책의 종말' 운운을 기우로 보기좋게 돌려놓았다.

1998년부터 첫 권이 나오기 시작한 '해리 포터' 시리즈 1, 2, 3권은 35개 언어로 번역돼 3천만권 이상 팔려나갔다. 이번에 나온 4권은 49개 언어로 번역돼 1백10개국에서 팔릴 예정이니 종이책 한 권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 7권으로 기획된 '해리 포터' 시리즈는 열한살짜리 소년 마법사 해리 포터의 1년간씩을 다루고 있다.

이모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라던 고아 해리는 마법사 자질이 있음을 알고 호그와트라는 마법사학교에 입학해 마법을 익히며 악의 무리들을 물리친다는 이야기다.

고아로 가족과 유리된 주인공을 내세워 마법학교라는 현실과 차단된 공간의 이야기니 오로지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언제든지 열한살의 상상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는 작가 조앤 K 롤링은 동심의 기발한 상상력으로 하여 생활보호금을 타던 미혼모 실업자에서 포브스지 선정,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1백대 인물 중 25위로 떠올랐으며 지금은 57년 된 증기기관차를 호그와트 마법학교처럼 꾸며 영국 순회 사인회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우리나라에서도 3권까지 번역돼 75만부 이상이 팔리고 있다. 이 책을 출간한 문학수첩에 따르면 독자층은 어른과 어린이가 반반씩이다. 사회의 갖은 속박 다 벗어나 동심의 상상력에 동참하려는 어른들도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다.

이같은 상상력은 바로 종이책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내년 타임워너사에 의한 이 작품의 영화화를 앞두고 미국에서는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해리 포터를 통해 확대.재생산해온 독자들의 상상력을 영화는 축소.획일화시킬 것이라는 비판이다. 영상에 비해 활자와 독서의 마력은 바로 독자의 능동적 상상력, 행간의 하얀 반성의 여백에서 나온다는 것을 전세계적 '해리 포터 신드롬' 이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경철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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