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속 영웅본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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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97년 12월 19일 새벽, 한국.

김대중(金大中)대통령 후보의 당선이 확실해졌다.

같은 시각, 97년 12월 18일 낮, 뉴욕. 한국 정부가 보낸 한 인사가 워싱턴행 셔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가 뉴욕에서 들은 소식은 '金후보 당선' , 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에 투숙한 다음날 아침 한국은행 워싱턴 사무소를 통해 받은 대외비 보고서의 내용은 '연말 외환보유고 예상액 마이너스 6억~플러스 9억달러' .

***진보.보수 넘나드는 정책

97년 12월 19일 오전 11시 40분, 워싱턴. 그는 래리 서머스 미 재무부 부장관(현 장관)과 마주 앉았다.

"미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한국은 국가 부도를 피할 수 없다. 국제 금융시장에도 큰 충격이 닥친다. 미국이 도와주면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플러스 알파' 를 이행할 것이다" "당신의 제안은 한국 정부의 위임을 받은 것인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이 OK를 한다면 金대통령 당선자도 같은 생각일 것임을 확신한다. "

'플러스 알파' 는 노동법개정.정리해고제도입.소액투자자보호와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 등이었다. 호텔에 돌아와 초조하게 답변을 기다리던 그에게 서머스 부장관이 전화를 걸어 온 것은 오후 5시였다.

"립튼 차관보를 한국에 보낸다."

97년 12월 22일, 일산. 서머스의 전화를 받은 직후 워싱턴에서 이미 유종근(柳鍾根)전북지사에게 전화로 "이 쪽에서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그 쪽에서 할 일만 남았다" 며 면담 결과를 알렸지만, 21일 귀국해 밤새워 보고서를 작성한 그는 22일 아침 金당선자를 직접 만나 자세히 설명했다.

金당선자의 '이해' 는 매우 빨랐고, 립튼 차관보와의 면담에서도 金당선자는 상대방을 확신시켰다.

97년 12월 24일, 워싱턴.

IMF, "연말까지 1백억달러를 한국에 조기 지원한다" 는 발표문 배포. 그해 연말, 수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애를 썼고 수많은 사연들이 묻혔겠지만 이상이 필자가 전해 들은 대선 직후 1주일 간의 한 장면이다.

요즘 금융구조조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노정(勞政)대립을 보면 '그해 연말 1주일' 의 장면이 오래된 영화처럼 겹쳐 보인다.

금융노조는 金대통령더러 "강제합병은 없다" 고 직접 확언(確言)해달라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대선 전 노동법 개정과 정리해고제 도입에 부정적이었고 '집권 후 IMF와 재협상' 발언으로 큰 논란에 휘말렸던 金당선자는 당선 후 1주일 사이에 지극히 자본주의적이고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확고히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새 장면이 겹친다. 의약분업이 추진되고 의료보험 통합이 실시됐다. 둘 다 DJ의 대선 공약이었으니 분명 '준비된 개혁' 이고 둘 다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개혁이다.

이제 의료보험료는 보험료라기보다 세금처럼 됐다. 많이 낸다고 더 받는 것이 아니라 많이 번 사람이 적게 번 사람들을 도와주는 체제다. 자영업자들은 소득이 밝혀질까봐 숨죽이고 있지만.

선거때 분명히 해둘 일들 의료계 폐업 때 게시판에 오른 '의약분업(별칭:으악분업)을 디벼주마' 라는 글은 현 정부의 정책을 '의료 사회주의' 라고 규정했다.

경제적 관점이 아닌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접근, 의료를 생산.이익.자산이 아니라 소비.비용.부채의 시각에서 보고, 의료의 효율성보다는 평등성을 중시하며, 그래서 의료비는 싸지만 결국 의료의 수준과 국제경쟁력은 떨어지고, 의사들은 '별 볼일 없게 된다' 는 논지다.

이처럼 겹쳐 보이는 장면들이 한꺼번에 여러 편의 영화를 본 것같이 혼란스럽다. 지금 정부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제3의 길' 을 걷고 있다고 할텐가. 헷갈리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이제 앞으로의 선거는 나서는 쪽이든 찍는 쪽이든 누가 보수이고 누가 진보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명확히 하고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결과에 승복하고 혼란을 줄이면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국가와 사회 체제를 선거를 통해 선택해나갈 수 있다.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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