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건강한 국민, 병든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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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12%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보다 훨씬 낮을 것으로 짐작되는 정치권, 즉 정치에 대한 신뢰도는 아마도 마이너스에 더 가깝지 않을까. 결국 병든 정치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국민이 있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기현상이 가능한 것은 우리 국민에게 있어 정치의 중요성보다는 오히려 정치에 대한 체념과 불감증이 체질화돼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치야 연일 추태를 연출하든 말든 국민은 각자 나름의 영역에서 자생적 동력과 질서를 유지하며 묵묵히 하루하루 버텨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건강한 국민’이 묵인하는 ‘병든 정치’로는 더 이상 나라의 안정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다.

전 세계와 함께 우리가 겪고 있는 이번 경제위기가 남겨준 가장 큰 교훈은 경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국가운영을 시장의 자율에만 맡길 수는 없고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즉 정치의 능동적 결정과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될수록 우리는 정치의 민주적 운영 여부를 소홀히 방치해 버리던 잘못, 즉 병든 정치를 묵인해 오던 관행에 더 이상 묶여 있어서는 안 된다. 바로 지금이 정치개혁을 위한 국민적 공론(公論)을 과감하게 활성화시켜야 될 시점이다.

획기적 정치개혁을 위한 범국민적 공론은 당면한 각자의 이해관계와 직결돼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국회정치개혁특위의 허망한 종결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민주국가의 기본규범과 운영 절차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약속을 새로이 하는 헌법논의만이 오늘의 한국이 필요로 하는 국민적 공론이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자주 강조하는 여당이나 현재의 체제나 절차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야당이 지난 2년 한가지로 헌법 논의를 피해온 잘못은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새해 들어 곧바로 헌법 논의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며 모두 동참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이다.

한국민주주의,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데에 이미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지 오래다. 지금과 같이 의회정치를 약화시키고 정당은 기형화될 수밖에 없는 권력 편중을 조장하는 대통령제, 특히 과도하게 집중되는 권력에 대해 책임은 지지 못하는 현행 대통령제는 어떤 형식으로든 개혁 보완돼야 한다. 우리처럼 의회의 기능과 권력이 약화된 채 변칙적인 파행 운영이 거듭되는 선진국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선거가 의회선거보다 훨씬 정치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며, 많은 모순과 문제가 이로부터 파생될 수밖에 없다. 세종시를 둘러싼 작금의 분열과 난투극도 대선의 역학이 자아낸 부작용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행 제도를 고수한다면 다음 대선, 다음 정권에서도 똑같은 혼란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의회정치가 국민적 불신 속에서 점차 무력화되고 있는 것은 의회 운영의 절차적 규칙이 확고히 제도화돼 있지 않은 탓이 가장 크다. 무엇보다도 규범적 차원에선 다수결의 원칙이, 반면 관행적 차원에선 여야 합의 또는 소수의 거부권 인정이란 원칙이 우선시되도록 혼선의 해결점부터 찾아야겠다. 예컨대 미국의 상원처럼 토의 종료와 표결을 위해 과반이 아닌 5분의 3의 다수표가 필요하도록 운영규칙을 고쳐 다음 19대 국회부터 실행한다면 난투극을 벗어나 표결에 순응하는 국회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010년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가망 없는 후진의 늪에서 벗어나 선진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는 마지막, 정말로 마지막 기회인 것 같다. 더 이상 사소한 이익이나 구실에 연연하지 말고 정치권이 앞장서서 범국민적 헌법 논의의 막을 올려야 한다. 건강한 국민과 건강한 정치가 함께 가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