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님의 스트레스 '수녀원도 사람 사는 곳, 선후배 갈등 힘들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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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호 22면

자신의 나이도 제대로 모르는 사위·손자에게 화가 나 자신의 식성 등에 대한 모의고사까지 치르게 만드는 중소기업 사장, “돌 때부터 생일상 한 번 안 챙겨 줬지만 원래 성격이 쿨해 괜찮더라”며 딸에게 ‘나 홀로 생일상’을 받게 하고 황혼의 로맨스를 즐기러 가는 아버지, 털털한 체육교사인 아내에게 “당신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것이 애교”라고 투덜대는 남편…. 화제가 되고 있는 MBC-TV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방구 순재’ 가족 이야기다. 드라마는 가족이 서로를 가장 잘 알면서도 상처를 가장 많이 주는 존재, 가장 가깝게 지내기 때문에 웃게도, 화나게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잘 보여 준다. 본지 취재팀의 설문에 응한 108명의 시민이 ‘올해 나를 화나게 한 사람’으로 꼽은 대상 1위도 가족이었다.

화나게 한 사람은

가족들의 작은 습관들이 상처로
21명이 남편·아내·엄마·딸·형·동생 등 때문에 화가 치민 적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그중 13명은 배우자를 꼽았다. “오래 함께하면서 서로 맞춰 가지만 가끔씩 술 때문에 다툰다”(박미리·48·여·떡볶이 노점상), “홍보 일의 특성상 술자리가 많은데 내 일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아내에게 화나기보다는 서운함을 느낀다”(염우종·37·회사원), “(남편이) 고맙기도 하지만 늦게 귀가하면 미울 때가 있다”(김선희·52·주부)처럼 음주나 귀가 시간 같은 일상의 작은 습관이 불만이었다. 상대의 무관심이나 배려가 부족한 행동을 지적한 이도 적지 않았다. 남편(4명)보다는 아내(9명), 30대 이하(3명)보다는 40대 후반 이상(11명)이 배우자에 대한 불만도가 컸다.

가족의 범주에 포함하진 않았지만 ‘남친’ ‘여친’을 꼽은 미혼자들도 있었다. “(남자친구가) 말을 잘 안 들어서”(김나연·19·여·대학생) 등, 좀 더 애교스러운 이유에서였다. 흥미로운 건 미혼 층 응답자도 여성(4명)이 남성(2명)보다 많다는 사실. 남성들의 배려심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의미일까, 여성들의 기대치가 그만큼 높다는 뜻일까.

직장을 다니는 이들에겐 종종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존재가 직장 동료나 선후배다. 20명의 응답자가 꼽아 화나게 한 사람 2위에 올랐다. 유승렬(25·경찰)씨 말처럼 “함께 있다 보니 부딪치는 일이 더러 있는” 탓일 게다. 최선명(37·교회 교역업)씨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다 보니 소통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고 했고, 자원봉사자인 이주용(78)씨는 “근무 교대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아 다음 스케줄까지 지장을 주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고 했다.

성직자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마리아(49) 수녀는 “수녀원도 사람 사는 곳이라 선후배 사이에 갈등이 있다. 내가 딱 중간 위치라 힘들다”고 했다. 물론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 간의 갈등은 기본이다. 김미정(48·여·은행원)씨는 “실적에 대해 직설적인 평가를 하는 상사”, 김진길(47·‘디자인 길’ 대표)씨는 “일은 잘하지만 무단 결근과 지각을 일삼는 인턴사원” 때문에 화가 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친구도 가깝기 때문에 더 쉽게 서운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아닐까. “자식 결혼에 부조금을 건네 보냈는데 고맙다고 인사 전화도 없더라”고 말한 송민선(61·주부)씨나 “과도하게 술주정을 하는 친구, 특히 술을 사 줬는데 나한테 술주정할 때 화가 난다”는 박상기(59·인쇄업)씨 등 6명이 친구에 대한 섭섭함을 표했다.

“약한 몸 관리 안 한 나 자신에게 화난다”
‘손님’ 때문에 화가 났었다는 7명의 응답자 중 상당수는 ‘무례함’을 이유로 들었다. 구두 수선사인 박호영(42)씨는 “구두 만지는 일을 하다 보면 만만하게 보는 손님, 얕잡아 보는 손님이 많다. 사람을 대할 때 배려심 없이 못되게 굴면 화가 치민다”고 했고, “젊은 나이의 고객이 ‘아줌마’라고 부르며 무례하게 할 때” 화가 나더라는 40대 후반의 텔레마케터도 있었다. 또 열차 승무원인 유연경(25·여)씨는 첫 칸부터 끝 칸까지 도망 다니다가 급기야 마지막 칸의 화장실 문 뒤에까지 숨은 무임 승차객 때문에 골탕 먹은 사연을 털어놓기도 했다.

또 다른 7명의 응답자로부터 ‘공공의 적’으로 지적받은 대상은 정치인이었다. “국회에서 만날 싸우는 정치인들을 보면 창피하다”(이명희·59·여·배송업), “난 이제껏 단 한번도 투표를 빼먹은 적이 없다. 그래서 더 배신감이 느껴지고 안타깝다”(임진수·59·자영업)며 성토했다.

"난폭 운전 보면 무섭고 불안해"
‘내 탓이오’를 외친 응답자도 4명 있었다. 박예리(33·여·배우)씨는 “몸이 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것은 전부 내 책임이다. 아프고 지칠 때마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했고, 김정호(64·건설업)씨는 “가족이나 사람들과 문제가 생기는 것은 전부 내 탓”(김정호·64·건설업)이라며 자책했다.

이 밖에 “난폭운전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섭고 불안해” 화가 난다는 이들과, 돈을 빌려가 안 갚는 사람이나 거짓말하는 장사꾼 등 신의 없는 사람들을 꼽은 응답자가 3명씩 있었다. 또 6명의 외국인 응답자 중 2명은 백인이 아니라고 차별하는 듯한 한국인들 때문에 화가 난 경험을 얘기했다. “잘못된 의료 지식 때문에 환자가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 사람”(김현우·32·소방관), “서해 교전 등을 일으켜 북한 병사들이 목숨을 잃게 만드는 김정일”(전성현·27·번역가) 등을 꼽은 응답자도 있었다. “별로 화난 경험이 없다”고 한 응답자도 15명이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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