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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데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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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크리스마스 축제가 먼저일까, 기독교의 탄생이 먼저일까. 우문(愚問)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에도 양력 12월 말은 지중해 연안과 유럽의 축제 기간이었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는 고전 『황금 가지』를 통해 각 지역에 이미 존재했던 동지(冬至) 축제가 기독교 신앙과 결합한 것이 바로 크리스마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같은 기독교 문화권에서도 지역에 따라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법에 약간씩 차이가 있다. 그중 영국과 호주, 캐나다 등에선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을 복싱 데이(Boxing Day)라고 부른다. 이날은 고용주가 피고용인들에게 선심을 쓰는 날이며, 가난한 이웃에게 기부를 하거나 집배원·환경미화원 등에게 팁을 주는 것이 전통이다. 북미 지역에선 연중 할인 폭이 가장 큰 바겐세일의 날이기도 하다.

이런 전통의 기원에는 여러 설이 있다. 초기 기독교도인 성 스테파노의 자선 활동을 기린 것이라는 주장에서 대항해 시대 때 배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화물과 돈의 일부를 ‘하느님의 몫’으로 떼어 놓았던 상자(box)에서 유래했다는 설명까지 다양하다. 고이 모셔진 상자는 배가 항구로 무사히 귀환하면 교회에 전달됐고 성직자들은 크리스마스 때 상자의 봉인을 뜯어 안에 있는 물자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는 것이다.

어쨌든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것이 선물 상자이니 그 다음 날이 복싱 데이라는 이웃 사랑의 날이 된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선물을 주고받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즐길 만큼 즐겼으면, 바로 다음 날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뜻일 게다.

성탄 무렵이 되면 국내에서도 나눔의 손길이 쏟아진다. ‘농가월령가’에 전해지듯 우리 민족에게도 한겨울인 동지는 팥죽을 쑤어 이웃과 나눠 먹는 날이었다. 지난 23일 심야엔 익명의 노부부가 구세군 자선냄비에 1억원을 기부했다는 소식도 들려 이런 전통이 아직 이어지고 있음을 알렸다.

가장 밤이 긴 날인 동지가 여러 문화권에서 기념일이 된 것은 이 밤만 지나면 태양이 다시 살아나 낮이 점점 길어지는 희망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춥고 긴 밤을 견디면 머잖아 따사로운 햇살이 돌아온다는 것을 믿었고,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겨울을 이겨냈다. 크리스마스/동지가 나눔의 시절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송원섭 JES 콘텐트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