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치안은 국민의 재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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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린이들이 괜한 트집을 잡아 보채거나 울음을 그치지 않을 때,흔히 어른들은 말했다. ‘저기 순사온다. 잡아간다.’라고.그러면 대개의 경우 순진한 아이는 잠시 긴장한다.

군사정권이 한 세대에 걸친 긴 세월동안 지속되면서 ‘순사’로 지칭되는 경찰상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을 향한 저항운동이 거세게 분출했던 80년대에는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닌 ‘민중의 몽둥이’로 낙인찍혔다.

로마병정처럼 중무장한 전경,최루탄과 페퍼포그, 닭장차, 그리고 드디어 참고인으로 끌고간 대학생을 고문으로 숨막혀 죽게 하는 등 부도덕한 정권의 파수병으로서의 이미지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

그런데 올해 들어 믿기지 않는 몇가지 체험을 했다. 궁벽한 오지를 여행하던 중이었는데 급히 짧은 원고를 어떤 잡지사에 보내야 할 일이 생겼다. 들고 있는 노트북 컴퓨터 디스켓을 들고 한참 난감해하고 있던중,시골의 작은 파출소가 눈에 들어왔다.

현관에 단정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씌어있었기 때문이다. 내 사정을 들은 ‘순사’는 친절하게 읍사무소의 직원을 연결시켜주었고 나는 그곳에서 전자우편으로 단 몇초만에 일을 끝냈다.

또 한 번은 역시 강원도 산간의 초행길이었는데 길을 묻는 내게 젊은 ‘순사’는 메모지에다 약도를 상세히 그려주었다. 이와 유사한 경험은 몇차레 더 있었다.

친절하고 예의바른 경찰,청결하고 신속해진 동사무소의 분위기등에서 나는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체감한다.

미국에서 십여년 살던 친구가 귀국해서 던진 첫마디가 서울이 뉴욕보다 훨씬 안전한 도시라는 말이었다.

‘국민의 정부’를 지지하는 개인적 호감일뿐 이런 느낌이 진정 보편적인 변화의 흐름일지 의심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던차에 미국의 영향력있는 3대 경제지의 하나인 bisiniss week가 한국의 치안총수인 경찰청장을 ‘아시아 스타’로 선정한 기사를 보고 매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몇 안되는 역대 한국인 수상자의 면모를 보면 대체로 시민운동가나 경제인이었다. 경찰청장의 선정배경이 불신,부패,비효율을 개혁하려는 강력한 의지,무최루탄과 폭력적 시위의 현저한 감소,미성년자 매매춘 단속의 성과등이라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경찰이 과거의 불명예를 벗고 명실상부하게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본연의 업무로 거듭 태어나려는 매우 가파른 몸짓이 아닐까 싶다.

여성의 진출에 폐쇄적이었던 직종이 돌연 문호를 개바어해서 ‘전투복을 입은 열명의 남자 경관 보다 폴리스 라인 앞의 여성경관 한명이 더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여성 친화적인 인사정책까지 내놓으니 여성인 나로서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이전에 가졌던 적대감을 버리고 주변의 경찰 몇 분의 생활을 들여다 보았다. 우선 보수가 과중한 업무와 위험도에 비해 유사한 직종의 같은 직급에 견주어 너무 낮은 수준이었다.

우량 민간기업과 비교하면 그 격차가 더욱 두드러져 겨우 60% 수준이다. 또한 독자적인 보수관련 법규도 없이 소방직과 동일한 봉급표를 적용하고 있는 점등은 매우 불합리 해 보인다.

그러다보니 98년 행자부 통계에 의하면 경찰관의 주택 소유율이 전체공무원에 비해 현저히 낮을 수 밖에 없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얼마후에 80년대 내내 나를 담당하던 형사가 오래 소식이 없어 우연한 기회에 알아 보았더니 그는 50세에 이미 작고한 후였다. 그 때 그의 동료가 내게 했던 말이 아직 가슴을 찌른다. ‘경찰은 수명이 짧아요.어디 오래 살 수 있나요’

치안은 국민 모두의 재산이다. 민주주의가 그렇듯이 세금을 내는 이는 누구나 골고루 혜택을 받는다. 철도나 항만이 사회간접자본이듯이 치안 역시 행정에서의 그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일본 등의 선진국에 비해 경찰 예산이 낮은 수준임에도 우리의 치안상태가 양호한 편이라면 이는 곧 경찰관의 희생위에 우리가 서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제 반세기의 냉전이 끝나고 동족이 서로 돕고 양보하면서 자주적으로 새 세기를 열어 나가려는 실로 놀라운 변화의 중심부에 우리는 서 있다.

분단을 유지하는 데 쓰던 비용이 점차적으로 남과 북이 모두 국민의 보다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쓰였으면 한다.

경찰이 신뢰받고 그 가족들이 함께 휴일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인간의 얼굴을 지닌 사회’가 하루바삐 오기를 바란다.

유시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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