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5. 소리 인생의 전환점

기생들의 소리선생을 수 년째 하던 중 문득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야할 곳은 단 하나, 바로 서울에 있는 조선성악연구회였다.

여기서 '성악' 이라는 말은 서양의 노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로 내는 음악' , 우리의 판소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 단체는 판소리의 공연 활성화와 신인 양성을 위해 1933년 송만갑.이동백.정정렬.김창룡 등이 주축이 돼 만들어졌다.

그 곳에는 당시의 명창이란 명창들은 모두 집결해 있었으며 소리를 배우려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댔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소리를 배우는 사람 수는 남자가 삼십 명 정도 됐고, 여자는 수백 명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임방울.김소희.김연수.박녹주 등이었다.

지금은 소리하는 우리가 못나서 그렇지, 스승들이 활동할 그 당시는 소리꾼의 인기가 요즘으로 치면 대중가수들의 인기를 뺨칠 정도였다.

비원 앞 종로구 익선동에 위치해 있던 조선성악연구회를 찾아간 것은 내 나이 스물이 넘어서로 기억한다.

이후 나의 소리는 그 곳에서 정정렬 선생께 배운 것과 나머지 명창들의 소리를 귀동냥한 것을 모아 독공으로 성숙한 것이니, 비록 반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 곳에 머물렀지만 내 소리 인생에서 그 시절의 중요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충청도 사람(공주)이기 때문에 사실 계보를 따지자면 중고제의 맥을 이은 이동백씨에게 소리를 배워야 했다.

그런데 전라도 사람인 정정렬 선생한테 배운 까닭은 목소리는 이동백씨가 더 나을지 몰라도 말붙임이라든지 소리 이면(裏面:판소리의 서사(敍事)내용)은 내가 듣기에 정정렬씨가 제일이었다.

정정렬 선생은 당시 조선성악연구회의 상무이사직을 맡고 있으면서 '신식 소리'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판소리의 현대적 창법과 창극을 만들어 내는데 능했다.

처음 정선생께 인사를 드리러 가니까 조그만 방에 여자들 열 몇과 남자 서너 명이 모여 앉아 소리 배울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선생이 "소리 한 번 해 봐라" 라고 하셨다.

나는 약 이십 분에 걸쳐 '아서라 세상사' 와 '쑥대머리' 두 대목을 했는데, 선생은 대번에 "너 소리 못쓰게 한다" 고 하셨다. 역시 장단이 문제였다.

그래도 내가 지방에서 소리 공부하러 힘들게 올라온 것을 기특하게 여겨 다행히 제자로 받아 주셔서 선생께 소리를 배우게 됐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나는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먹고 잤다.

서울에 올라간 때가 한겨울이었는데 방이 어찌나 추운지 덜덜 떨며 지새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선생께서 소리를 가르치는 방식은 일대일 교습이었다. 먼저 시범을 보이고 그 다음에 제자가 선생의 소리를 따라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제자 한 명에게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차례가 돼 십여 분간 소리를 배우면 금방 나갔지만 몸집이 조그마했던 나는 있는 둥 없는 둥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남들 배우는 것을 일일이 적으며 공부했다.

정선생은 당시 60대 초반이었는데, 요즘으로 치면 아마 위암에 걸리신 것 같았다. 음식을 잘 못 들어 내가 배우개장(지금의 동대문 시장)에서 녹두죽을 사다 나르곤 했다.

툭 하면 "아, 나는 이제 얼마 못 살겠다.

내 소리 다 누가 가져갈래, 누가 가져갈래" 라며 통탄하기 일쑤여서 그러실 때마다 제자들은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조선성악연구회가 있던 자리는 이후에 수은 목욕탕이 돼 나도 소리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몇 차례 가보곤 했는데, 지금은 가정집으로 바뀌었다.

정리〓김현정 기자

박동진 <판소리 명창>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