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내정정비 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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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최근의 상황을 보면 이 나라가 과연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 이 정부의 기강과 관리능력을 믿어도 좋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같은 정부 안에서 이 장관의 발언에 저 부처에서 반박성명을 내는 나라가 또 있을까. 도대체 한 부처의 장.차관이 정반대의 발언을 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국방부의 반박을 받은 통일부장관의 국군포로가 없다는 발언, 김정일(金正日)의 평양공항영접을 몰랐다, 알았다고 다르게 말한 통일부 장.차관의 혼선 등은 대충대충 넘길 일이 아니다.

평양회담의 성과를 자랑하는 말들을 중구난방으로 쏟아내다가 도로 주워담느라 급급한 모습도 마찬가지다.

야당에, 국회의원에게, 언론사 간부에게, 종교인에게 자랑스레 얘기해놓고 그 걸 보도한 신문에 대해서는 출입정지를 시키고, 발설책임을 놓고는 엉뚱하게 여야간에 정쟁이 벌어졌다.

이런 모습에서 남북 정상회담이란 역사적 대사(大事)가 요구하는 진중하고 사려깊고 현명한 일처리의 자세를 느낄 수 있겠는가.

고위층들의 이런 모습에서 국가기밀을 다루는 정보관리능력이나 감출 일은 감추고 알릴 일은 알리는 보안능력.홍보능력이 이 정부에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이런 상황을 평양이 어떻게 보고 있을지 생각하면 기가 찬다.

"잘 들 노는구만" 하고 경멸하거나 박장대소하며 비웃지나 않을 것인가.

한마디로 우리 지도층이 입이 너무 가볍고, 신뢰성이 약하고, 자랑하고 싶은 걸 못참는다는 느낌을 주기에 족했다.

의료대란 사태도 정부관리능력의 현주소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어떤 정책이라도 성공적.안정적 추진을 위해 미리 여건과 분위기를 점검.조성하는 것은 정부의 기본적 책무다.

하물며 국민생명과 건강에 직결돼 있고 이익단체간의 날카로운 충돌이 불을 보듯 빤한 의약분업 같은 일은 더욱 그런 사전 노력이 충분히 있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의료대란이 일어난 그 자체가 정부로서는 엄중히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의사폐업이란 상황에서 정부가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은 의사집단과의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부터 구하는 일이다.

정부가 아무리 옳고 의사집단이 아무리 그르더라도 그 논쟁에서 이기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 보면 정부 - 의사간 대결만 두드러졌을 뿐 의사를 기다리는 수만.수십만명의 절박한 호소에 답하고 국민을 안심시키는 정부의 노력은 결코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아플 권리도 없어" 하고 농담조로 말했지만 실은 아파도, 사고를 당해도 대책이 없다는 공포심리는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익집단간의 갈등을 관리.조정하는 것이 정부와 정치의 할 일인데 이런 능력이 없는 정부라면 국민이 어떻게 믿고 안심하고 살 수 있을까.

이런 관리부재(不在)의 혼란.혼선이 더 이상 계속될 수는 없다. 다시 정부의 기강을 잡고, 분위기를 쇄신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조치가 빨리 나와야 한다.

정부부터 남북회담의 흥분에서 빠져나와 빨리 국정태세를 재정비해야겠다. 그러기 위해 먼저 시급히 할 일은 개각을 포함한 집권진영의 일대개편이다.

남북회담 뒤에 나타난 혼선.판단착오.신뢰실추 등에 대해선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역사적 회담의 성공까진 잘 됐지만 그 후의 난조(亂調)나 미숙으로 보아 현 팀은 역부족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남북회담의 감격에 묻혀 넘어갔지만 대통령환송.환영에 유치원생과 시민 동원령을 발상한 구태의연한 당국자도 문책해야 할 것이다.

의료대란과 관련해서도 현 팀에 의약분업을 맡기기는 어렵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경제계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현 경제팀에 대한 시장(市場)의 신뢰가 바닥이라는 말이 공공연하다. 장관들의 말바꾸기가 예사고 자율과 관치(官治)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지금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자금경색.금융불안도 정부불신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국정의 구석구석에 개편요인은 누적돼 있고 능력한계와 수준미달이 드러난 대상자도 수두룩하다.

최근의 나사 빠진 현상이나 신뢰실추도 적시(適時)의 개편을 통해 적절한 긴장감을 주었던들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개편을 늦추면 늦출수록 나라와 정부에 손해가 될 뿐이다.

개편→ 분위기 쇄신→ 새 기강→ 새 팀워크→ 새 각오로 청신한 새 바람을 일으키고 국정을 재정비해야 한다.

4.13총선과 역사적 남북회담으로 조성된 새 환경과 새 과제도 그걸 요구하고 있다.

송진혁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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