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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김기덕 감독 "고정관념 깨고 싶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83분 짜리 영화 '실제상황' (24일 개봉) 은 촬영하는데 고작 3시간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장편영화 찍는 데 보통 2, 3개월씩 걸리는 걸 생각하면 굉장히 파격적이다.

통상 한 두 장면 찍는 시간에 영화 한 편을 '뚝딱' 만들어낸 이는 김기덕(40) 감독. 1996년 '악어' 로 데뷔한 이후 '야생동물보호구역' '파란대문' 최근작 '섬' 까지 악바리처럼 작품을 다산(多産)해 온 그는 이번 시도가 "결코 이벤트성 기획이 아니다" 고 강조했다.

첫 발상을 한 건 약 1년전. "영화를 만들 때마다 왜 영화는 이처럼 번잡하게 제작되어야하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왜 장면 하나를 찍을 때마다 조명을 바꾸고 카메라 앵글을 달리해야 하는지, 배우는 한 장면을 찍고 난 다음 한참 쉬다가 다음 장면을 찍는데 그게 과연 감정선을 제대로 살리는 연기인지, 충무로에서 관행처럼 사용하는 조명 방식은 현실의 빛과는 다른 것이 아닐까 등등. 또 제작 기간도 너무 긴 것 같았다.

첫 영화 '악어' 는 넉 달에 찍었고 '섬' 은 한달 반, '파란대문' 은 90일 걸려 찍었다. 그러면서 항상 더 짧은 시간에 만들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

"최단 시간에,가장 현실에 가까운 영화 공간 속에서 만들어 보자" . 가까운 이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대부분 "아이디어는 좋으나 실제로 제작하기는 좀…" 이라며 현실성을 문제 삼았다.

그러다 '수탉' 의 신승수 감독이 '한 번 해보자' 며 제작을 맡아주는 바람에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공간을 릴레이식으로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35㎜ 카메라 여덟 대, 디지털 카메라 열 대를 동원했고, 촬영.녹음.조명팀을 각각 4개조로 나눠 분산시켰다.

각 시퀀스를 맡을 보조 감독도 12명을 썼다. 각 장면은 당연히 '원 컷' 으로 갔다. NG가 안 나도록 치밀하게 리허설을 했다.

'실제상황' 은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을 하는 주인공(주진모)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과정을 그렸다. 그림 실력이 형편없다며 모욕했던 사진사, 애인을 빼앗은 친구, 강간범으로 몰아 붙였던 형사 등 구원(舊怨)이 있는 이들을 백일몽 속에서 하나씩 살해하는 것이다.

주진모는 한 곳에서 연기를 한 뒤 다음 장소로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김 감독은 "다행히 큰 차질없이 애초 의도에 근접한 형태의 영화가 탄생했다" 고 말했다.

"1백% 만족하는 건 아니지만 '이번 영화는 실패해도 성공한 것' 이라는 스태프 중의 한 명이 한 말에 공감한다. 영화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고 싶었다. 제작자든 관객이든 영화라고 하면 기술적으로 매끈한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조명이 엉성해도 사운드에 외부의 소음이 끼어들어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는가.

길가던 사람들이 주진모를 알아보고 돌아보는 장면까지 그대로 살렸는데 이런 걸 통해 픽션(드라마)과 현실(다큐)이 섞이고 경계가 무너지는 체험을 했다. 앞으로 영화하는데 좋은 거름이 되리라 본다.

흔히 영화가 잘 안 나오면 촬영기간이 충분치 않았다' 고 변명하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좋은 영화는 결국 감독의 양식과 사고의 깊이에 좌우된다는 거다.

1백년간 형성된 영화의 형식들에 집착하지 않는게 중요하다. 요즘 디지털이 영화 형식을 바꿀 거라고 얘기들 하지만 그런 것 말고도 기존의 형식을 타파할 방도는 얼마든지 있다는 걸 배웠다. "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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