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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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2. 명창의 꿈 안고…

사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엔 어린 소견에도 '졸업하면 군청 급사라도 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학교에 다녀 보니까 '여기서 배워봤자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회의가 더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교무실로 불쑥 들어가 학교를 안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조선인입니다. 당신들은 우리 나라와 서로 약조한 게 있지 않습니까? 소위 내선일체다, 형제의 나라다라고 해놓고 우리 조선인들은 죽도록 해봤자 뭐가 될 수 있습니까?"

이런 말을 남기고 무작정 학교를 뛰쳐 나왔다. 그러나 부모를 어떻게 설득할 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던 차에 협률사의 공연을 보고 반한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그날 밤은 남의 집 추녀 아래서 자고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소리꾼들의 숙소인 대전역 앞 중앙여관으로 찾아갔다.

나를 맞아주는 사람은 장판개씨였는데, 얼굴은 박박 얽힌 곰보였지만 소리는 무척 잘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그 분은 실망스러운 말을 했다.

"소리를 배우는 데는 조건이 많으니라. 우선 여기저기 이동하는데 차비가 있어야 하고 또 밥값도 가져와야 한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나는 그 말에 낙담했다. 소리 인생 70년에 겪은 첫 좌절이었다.

힘없이 발길을 돌렸지만 귓전에는 전날 들은 명창들의 소리가 계속 '엥하고 '맴돌았다.

사흘 동안을 낮에는 깃대를 들고 밤에는 소리 공연을 보았다. 어렵게 품을 팔아 보는 공연이니 그 소리가 머리 속에 절로 다 들어왔다.

그 때 들은 소리 중 제일 인상적인 것은 이화중선의 '만고강산' 이었는데 가만히 서서 얼굴 표정도 짓지않고 부르는데 그 소리 곱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더는 학교를 못 다니겠다" 고 말씀을 드리고 말았다.

말로는 아버지 밑에서 농군이 되겠다 했지만 머릿속엔 온통 소리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집안일을 도우며 보내던 중 동네 사람들과 산에 송충이를 잡으러 가게 되었다.

남들은 도시락을 먹었지만 밥이 없는 나는 구석에 가서 소리 연습을 하니 산천이 다 쩌렁쩌렁했다.

"너 그런 걸 어디서 배웠느냐" "목소리가 아주 좋다" 어느새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어 칭찬을 하니 기분이 우쭐했다.

그렇게 입소문이 퍼져 하루는 아랫동네 환갑 잔치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다.

북도 장구도 없이 혼자 앉아서 소리를 하는데 소리를 들은 어르신들이 5전도 주고 10전도 주니 어느새 1원을 넘게 벌었다.

그 돈을 가지고 가서 아버지께 말했다. "천상 집을 나가야겠습니다. 배고파서 도저히 살 수도 없고…. 소리 선생님을 찾아 갈랍니다."

그리고 나서 이화중선에게 언뜻 들은 적이 있는 손병두 선생을 찾아 청양군으로 출발했다.

때는 한여름. 그때만 해도 늑대와 호랑이가 버글버글했던 계룡산을 혼자 넘어 나루터에 다다랐는데 장마가 끝난 직후라 강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마침 공주 장날이라 배에는 장꾼들로 꽉 차 있었고 험악해 보이는 뱃사공들은 술에 취해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었다. 물론 돈이라곤 한푼도 없었다.

"뱃삯 줘. " "없어유. 나중에 드릴게유. "

"언제?" "오다가 드릴게유. "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그러자 두 놈이 오더니 욕을 하며 "저 놈을 강물에 처박고 가자" 고 위협하는 게 아닌가.

다급한 마음에 나는 "소리를 할 줄 알아요" 라고 외쳤다.

그리고 나서 '심청가' 한 대목을 하는데 배는 고프지, 뱃삯은 없지 처량한 내 처지와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가는 심청의 신세가 중첩돼 슬픈 마음에 마구 울면서 소리를 했다.

그러자 배에 탄 노인들이 "너 참 큰 명창 되겠다" 며 남의 소리를 거저 들을 수 없다고 모자를 벗어서 돈을 모아주었다. 그렇게 모인 돈이 1원 45전이니 큰 부자가 부럽지 않았다.

배에서 내리려니 아까 겁을 주던 사공들이 "너 소리는 잘하니까 그만 배우고 사공질을 하라" 고 꼬드기는 것이었다. 속으로 '내가 늬들보다 훨씬 낫게 될 거다' 고 다짐하며 세차게 고갯짓을 했다.

박동진 <판소리 명창>

정리〓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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