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상희구 '하지'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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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모란 모란 큰 꽃송이들이

천천히 벙그는 것이 보이더니 우산처럼 점점 커지면서

와락 내 얼굴을 덮어버려 꽃향에 취하니

생아편 같은 낮잠은

끈끈한 침으로 흘러

뒷마루 늙은이들의

듬성듬성 누런 이빨 틈에서

극락조 한마리씩 튀어나오더니

저마다 훌훌 날아 온 천지를 덮어버리자 이내 캄캄해지고

쏴-하고 소나기 줄기가 끝도 없이

-상희구(58) '하지'중

일찍 해가 뜨고 늦게 해가 지는 하짓날,무더운 긴 여름의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다.장자(莊子)의 나비꿈이라도 꾸는 것일까.생아편 같은 낮잠이 달콤하게 몸 속으로 흘러든다.마치 노승이 소나무 아래에서 물소리를 들으면서 선시(禪詩) 한 수 읊어내듯 쏴아 소나기가 시원하다.

에어컨 바람이 아닌 합죽선에서 이는 그런 맑은 바람!

이근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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