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제 3의 길' 은 사라지는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 5월로 젊고 활기찬 토니 블레어가 영국총리로 취임한 지 3년이 지났다.

그는 새로운 노동당을 표방하며 18년 만에 보수당을 물리치고 세계적인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블레어는 21세기를 열어갈 자신의 정치이념으로 '제3의 길' 을 채택했다.

'제3의 길' 은 과거의 노동당 및 대처 시대와 결별하고 새로운 영국을 건설하겠다는 블레어의 정치적 독립선언이었다.

'제3의 길' 을 내세운 그는 시장의 효율을 통해 경제발전을 추구하면서도 공정성과 사회정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 연대와 타인에 대한 책임이라는 불변적인 사회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겠다고 공언했다.

'제3의 길' 에는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이상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3의 길' 은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이념으로 환영받았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하면서 '제3의 길' 과 블레어의 인기는 더욱 상승했으며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총리와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제3의 길' 을 지지하고 나섰다.

김대중(金大中)정부가 초기에 표방한 민주적 시장경제와 뒤에 나온 생산적 복지도 '제3의 길' 과 유사하다.

우리 사회의 많은 지식인들은 사회통합에 역행하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제3의 길' 을 원용하기도 했다.

'제3의 길' 이 좌파이념의 순결성을 훼손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한 이후에도 '제3의 길' 은 사회정의나 연대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제3의 길' 은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11월 이탈리아 피렌체 회담에 이어 이달초 베를린에서 열린 네번째 '21세기 진보정부' (제3의 길)정상회담에서는 '제3의 길' 에 대한 경계(警戒)의 목소리가 분명히 드러났다.

정상들은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들은 "국가는 금융시장의 과도함을 체크하면서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창출한 부를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 고 말하면서 국가가 시장경제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 회담과 달리 이번 회담에서는 '제3의 길' 이란 말이 공식적으로 자취를 감췄다.

이번 회담을 주관한 독일측은 슈뢰더가 몸담고 있는 사민당 내부의 좌파세력과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총리를 의식해 '제3의 길' 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제3의 길' 에 대한 국제적 연대가 약해지고 있는 증거다.

국내 사정도 좋지 않다. 블레어는 지난 7일 여성단체연합 연설 도중 청중으로부터 야유를 받았고 이후 여론조사에서 노동당 지지도는 내려갔다.

윌리엄 헤이그 보수당 당수는 블레어 정부는 '공허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며 가장 기본적인 약속도 이행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블레어가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노동당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노동당 사무총장이었던 소이어경(卿)은 "정부와 당 사이에 정부와 국민 사이의 불신보다 더 나쁜 강한 불신이 존재한다" 고 우려를 표명했다. 노동당 심장부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는 셈이다.

'제3의 길' 에 단호하게 반대해온 조스팽은 프랑스 경제의 고질병이었던 고(高)실업률을 9년 만에 최저수준으로 낮추고 견실한 경제성장을 이룩해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베를린 정상회담에서도 '정치로의 복귀' 를 역설했다. 시장이 아니라 '정치' 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추상적인 이념은 현실의 결과를 통해 검증된다. 이념의 우열과 존폐는 현실의 구체적 성과를 통해 결정된다.

어떤 이념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현실적 성공이 없으면 폐기되게 마련이다.

'제3의 길' 은 하나의 정치적 이념으로는 성공했지만 가시적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해 위기에 직면했다.

블레어가 '제3의 길' 을 포기하거나 '제3의 길' 때문에 자신이 추락하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하이에크의 지적처럼 애당초 중도는 존재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좌와 우, 국가와 시장이 동등한 위치에 자리할 수는 없다. 시장이면 시장, 국가면 국가로 확실한 길을 가야 한다.

둘 모두를 취하려는 것은 정치적 과욕이다. '제3의 길' 이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신동섭 <강원대 교수.철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