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곁에서 본 정상회담] '연구대상'과 꿈같은 만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북한을 연구해온 학자들이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대부분 북한땅을 밟아보는 것이며, 베일에 싸인 그곳의 고위 지도자들을 만나보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북한지도자들을 직접 만나는 것은 이 체제의 특성상 소설가가 자신이 쓴 책 속의 주인공을 현실에서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6월 14일 만찬과 15일 오찬에서 북한연구자로서 바로 천재일우의 행운을 잡았다.

이틀동안 나는 그동안 내가 쓴 북한관련 저서 4권의 주인공과 조연들을 두차례나 만나 대화를 나누는 꿈같은 시간을 가졌다.

이미 10년 전부터 지도자로서의 그의 자질을 정당하게 평가해올 것을 요구해 온 내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내밀었을 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이 들었다.

국내 최초로 김정일 논문을 썼고, 그 뒤 이 지도자 연구에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나로선 그 의미가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호방한 웃음과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오랜 외교관 생활이 몸에서 풍겨나는 김영남 상임위원장, 좀처럼 보기 어려운 양복차림의 조명록 차수, 마치 대학시절 국제법 은사님처럼 생긴 김책의 아들 김국태 비서,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군인풍이 나지 않는 샌님 스타일의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담당 부국장 현철해 대장, 학교 선생님 같은 선전담당 부국장 박재경 대장, 당 선전의 실세인 최춘황 중앙당 선전부 제1부부장, 金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마치 작품 속의 인물들을 대하듯 나는 그들의 모습을 새겼다.

순안 비행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본순간 나는 한반도의 역사가 다시 쓰여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미리 도열해 있던 환영 군중들의 '김정일' 연호와 함께 활달한 걸음걸이로 나타난 그는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하러 북한서열 2, 3위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대동하고 대한민국 대통령 전용기가 멈춰선 활주로로 나갔다.

드디어 형제간의 반목시대는 종식되는 것인가.

50분만에 온 평양이었다.

'지금 북위 38선을 넘고 있으며 2시 방향으로 장산곶이 보인다' 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간지 잠깐 사이에 넓은 평야지대가 나타났다.

곳곳에 같은 모양으로 규칙적으로 서있는 협동농장의 주택과 안마당의 텃밭들이 이곳이 사회주의국가라는 것을 하늘에다 시위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북한.중국 국경지방을 수도 없이 방문해 북한실태를 조사하고,빨갛게 두 눈이 충혈되면서까지 북한 문헌을 읽고 분석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내가 보냈던 그날들은 결코 한 지역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과 적대적 갈등으로 고통받는 이 민족에게 평화와 통일의 길을 찾으려는 우리 시대의 보편적 의지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金위원장이 연장자인 金대통령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 공항에서 숙소까지 동승해 갈 때 이제 상생(相生)의 길이 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측의 환영행사는 대단했다.

안내선생은 이번 행사를 "위대한 수령님이 서거하신 후 최대 행사" 라고 평가했다.

또다른 이는 90년 장쩌민(江澤民)중국공산당 총서기 방문 때보다 더 '센' 환영행사라고 했다.

이런 주최측 인사의 설명이 없더라도 약 20㎞의 연도에 나온 60만 인파의 열광하는 모습에서, 나는 북측이 이번 회담에 거는 기대를 엿볼 수 있었다.

어쩌면 金위원장은 이번 행사를 통해 자신은 운둔의 왕국의 교주가 아니라 보편적인 세계정서를 숙지하고 있는 합리적인 지도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환영나온 북측 주민들은 동원된 군중 이전에 통일을 열망하는 동포였다.

그 중에는 우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열광에 감동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마치 남과 북이 마음만 열면 통일이 될 듯이 생각하는 그들에게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적대적인 대결상태를 해소하는 평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

평양에서의 첫날은 지금 내가 역사의 시간 속에 있다는 긴장과 부산한 바쁨이 교차하는 가운데 흘러갔다.

외국 수반들이나 투숙한다는 주암산(酒岩山)초대소에서 꾀꼬리 소리에 잠을 깼다.

아, 여기도 우리 땅이구나. '

28년 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만약을 대비해 청산가리를 가슴에 품고 평양에 왔다는 데, 이렇게 편히 잘 줄이야. 이렇게 편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이미 나의 몸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음을 먼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6월 14일 저녁 목란관 만찬장, 북한의 나라꽃인 목란을 딴 이 귀빈식당에서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오후 3시부터 4시간에 걸친 마라톤회의를 마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일행이 입장한 것은 오후 8시쯤이었다.

연장자에 대한 예우를 깍듯이 지킨다는 소문대로 金위원장은 金대통령을 앞에 서도록 권유하며 박수를 치며 입장했다.

9시30분쯤 그날 따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북한의 김용순 비서가 다급하게 金위원장에게 다가가 서류를 건넸고 金위원장은 만찬장의 헤드테이블에 앉아 몇분 동안 그것을 읽고 무언가 지시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용순 비서로부터 전갈을 받은 林동원 특별보좌역이 바빠졌다.

그리고 金대통령도 수분동안 서류검토를 하고 林보좌역에게 무엇인가 지시를 했다.

얼마 후 金대통령은 연단에 나와 남북정상이 공동선언문에 완전히 합의했음을 공표했으며, 만장의 박수를 받으며 金위원장의 손을 쳐들며 민족공영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만방에 알렸다.

파격이었다.

아마 만찬장에서 양 정상이 합의문 초안을 검토하고 또 수정지시를 하며 다시 합의에 이르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우리라. 나는 만찬장에서도 기분에 흔들리지 않고 역사적인 문건을 검토하는 양 정상을 보면서, 그들이 만든 선언이 휴지조각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평양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비행장으로 향하면서 나는 새로운 남북관계의 저변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이번 정상회담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린 나의 결론은 북한의 대남전략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보좌하는 최측근 인사들이 우리 일행을 맞이하고,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길 극력 꺼려했던 통일전선부 제1 부부장이 옆자리에 앉아 나와 민족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는 사실이 바로 산 증거가 아닌가.

확실히 북한의 대남전략 방향은 기존의 혁명전략이 급격히 약화되고 체제의 생존과 유지발전이라는 생존전략적 차원이 크게 부각되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남북관계를 공존형 모델에서 바라보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로 그 변화가 남북공동선언문에서 연방제 수정으로 나타난 것으로 느껴졌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정상회담 특별수행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