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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4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47. 별난 애정표현

사람들이 왁자지껄 들어오고 있다. 먼저 와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문쪽을 본다. 이가 잘 맞지 않는 탑골의 나무 대문의 윗쪽에 달린 방울이 딸랑딸랑 울리며 낯익은 사람들이 서로 눈인사를 나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와 연인처럼 꼭 껴안는다. 그리고 한참동안 입을 맞춘다. 들어오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한다.

"야, 송기원이 한테 입술 뺏기지 않으려면 빨리 가서 조용히 앉아. "

"입술만 뺏긴다면 그까짓 것, 천 번이면 어때, 혀가 뱀처럼 쑤우욱 들어오니까 문제지. " 그러나 송기원 시인의 입술을 피해갈 문인은 아무도 없다.

나이가 든 시인 신경림.민영, 소설가 현기영씨는 물론 비교적 젊은 편에 속했던 문학평론가 진형준.임우기, 시인 김사인.이재무.이승철, 소설가 김남일.방현석 등등. 모두 입맞춤을 피하지 못했다.

여자문인은 안심해도 된다. 남자들 상대하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만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인가□ 그것도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일뿐이다. 송기원 시인이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문인뿐이랴.

"나이가 마흔이 넘응께/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열여덟살짜리 처녀가/남자가 뭔지도 몰르고 들어와/오매, 이십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 땜시 그란달 것도 없이/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어서/안즉까장 여기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뚱아리도 좋다고/탐허는 손님들이/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 '살붙이' 라는 시다.

너무나 많이 들어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작품이다.

늙은 창녀의 회한조 넋두리를 그대로 베껴놓은 듯한 시 속에 서려있는 사람에 대한 깊디 깊은 사랑은 참으로 장엄하다.

인생의 맵고 짜고 쓰면서도 동시에 단맛이 이 시에 잘 익은 장아찌처럼 박혀있는 것 같다.

자신의 몸을 세상이라는 장터에 내놓고 이리 저리 팔면서 겪었을 회한과 서러움이 얼마이랴. 하지만 이제 그 설움을 거둬들이고 인간들의 서러운 몸짓과 외로움을 이 여인은 본다.

외로움을 애틋하게 여기다 못해 내가 그들의 살붙이는 아니었는지를 가늠해보는 마음이 내게도 그대로 전달돼 아프도록 어여쁘다.

탑골을 자주 찾는 많은 시인들을 보며 가끔 '위대하다' 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 설움 저 설움 다 있어도 제 손톱 밑에 박혀있는 아픔이 제일로 크다고들 하지 않는가. 제 설움이나 슬픔이 힘겨워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고통쯤은 안중에도 없이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다.

그런데 시인이란 참으로 독특한 이들이어서 이렇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고스란히 받아내 언어로 수놓는다.

이상한 일은 사랑도 아니 사랑의 표현형식도 전염된다는 것이다.

송기원 시인의 입맞춤은 문학평론가 진형준.임우기씨에게 옮아가 한동안 그들도 다른 남자문인들의 기피대상이었다.

작지 않은 그 입들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궁리하고 헤매는 모습이라니. 그 사이 송기원 시인은 새로운 사랑형식을 개발하기도 했다.

'볼태기 잔' 이라고도 하고 '입술잔' 이라고도 불렀는데, 먼저 맥주를 마신 송기원 시인이 다른 사람의 입술에 맥주를 전달해주는 것이다.

입맞추는 것을 피해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주는 더욱 진한 사랑. 따뜻하기도 하고 미지근하기도 하며 찝질하기도 한 그 잔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장실로 달려갔던가.

집요하고도 어두침침한 송기원 시인식 사랑은 참으로 많은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아름다운 악동' 은 지금은 어디서 또 어떤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

한복희 <전'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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