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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 맥잇는 재야 유학자 이우섭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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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학문을 할라면 두문불출(杜門不出)해야제. 자꾸 왔다 갔다 하면 학문이 되는감. 선비라는 사람은 자고로 세상의 물욕과 관직을 탐하면 안되는기라. "

경남 김해시 장유면 덕정마을에 있는 월봉서원에서 평생 학문에만 전념해온 노유학자 화재(華齋)이우섭(李雨燮.70)옹. 백포백의(白袍白衣)의 풍모는 잃어가는 우리의 전통, 그 자체다.

기호학파 간제 전우, 석농 오진영에서 그의 선친 월헌 이보림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맥을 잇고 있는 그는 세종대왕 19대 손으로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학자로 손꼽힌다.

학자들 사이에선 화재를 영남 기호학파의 마지막 유학자라고도 부르는 데 이는 기호학풍을 잇고 있지만 조선 영조 때 사화로 영남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맥과 학풍을 이리저리 캐물으면 "기호니 영남이니 그런 거 따지고 가를 필요가 뭐가 있노. 배워서 좋은 것만 취하면 되는 것이지. 학문이 높고 도덕이 높으면 배울 일이고 인자는 덕을 좋아하면 그만 아니겠나" 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가 지난달 12권으로 된 문집 '화재집' 을 내놓았다. 재야 유학자로 평생 써 내린 시(詩)와 서(書)를 모은 이 문집은 방대한 양과 학문의 경지를 따져볼 때 어쩌면 이 시대의 마지막 문집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게 후학들의 평가다.

본래 문집은 대체로 글쓴이가 죽은 후 묶는 것이지만 이번 문집은 문생들이 이례적으로 그의 생전에 수습하여 엮었다.

양이 워낙 많아 사후에는 정리가 어렵고 문집을 보내야 할 곳도 적지 않아 제자들이 간행을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이병혁 부산대 교수는 "이번 문집에는 태극론 등 성리학의 글은 물론 시와 문장이 들어있는데 그의 문장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 같아서 그의 연배에서는 전국에서 일인자일 것" 이라고 평가한다.

화재의 철칙은 '말씀대로 배우고 알면 실천하라' .선비는 때가 되면 사심없이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그가 강조하는 말이다.

"율곡 선생이 관직을 물러날 때 다른 사람들이 그만 두면 안된다고 하니까 선생은 사양하는 마음이 있어야 정치가 된다며 그 제의들을 잘라버렸는기라. 그 정신을 오늘에도 배워야된다 이말이지. "

성균관에서 화재를 부른 적도 있지만 세상에 나서지 않은 것은 시대가 자신과 맞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화재는 자신을 일찍이 명예와 지위를 버린 사람으로 오직 학문하기와 제자 양성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로 여겼다는 것이다.

현재 화재의 문하에는 정경주 경성대 교수, 박병연 한국정신문화원 교수 등 2백 여명이 있다. 이들은 양지(兩止)계를 만들어 1년에 두 차례씩 모임을 갖고 화재의 학문을 배우고 있다.

화재는 평생 일궈온 업적을 마무리하면서도 허전해 하지 않는다. 제자들의 따뜻한 마음뿐 아니라 네 아들 가운데 막내 준규(30)씨가 영남 기호학통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준규씨는 부산대에서 한문학 석사를 마치고 고려대 한문학 박사과정에 있으며 이번 문집 간행에도 참여했다.

김해〓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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