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코드 2000] 장례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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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풀어헤친 머리에 굴건을 쓰고 누런 삼베옷을 걸치고 짚신을 신었다. 이마와 허리에는 동아줄을 매고 지팡이를 짚고 곡을 한다. 아이고- 아이고-. 부모를 잃은 죄인(상주)은 나흘째 되는 날에야 비로소 죽을 먹을 수 있다.

밤낮으로 조문객을 받아 절을 하고 곡을 한다. 마을 곳집에 모셔뒀던 상여를 상두꾼 20여명이 메고 장지로 향할 때는 상엿소리가 구슬프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북망산천 나는 간다. " 망자를 묻고 집으로 돌아와 신주와 혼백을 안치한다. 곡을 끝내는 것은 삼우제를 지낸 이틀 후다. 돈을 받고 곡을 해주는 곡부(哭婦)까지 동원됐다.

1~3년씩 상복을 입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곡을 하고 제사를 지낸 뒤에야 탈상을 한다. 임종부터 탈상까지는 30여 단계의 의례를 치러야 한다. 7일장, 9일장이 보통이고 달을 넘기는 유월장(踰月葬)도 드물지 않은 것이 전통 장례예절의 절차다.

까마득한 옛날 풍속 같지만 실은 70년대 중반까지도 지방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집에 불이 나자 조상을 모신 위패부터 들고 나온다던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신주 모시듯 한다' 는 표현이 있었을까.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요즘의 장례예절은 '짧게, 간략하게' 로 치닫고 있다. 집에서 임종을 맞아도 '당연히' 영안실로 모시고 간다. 전국장의업연합회 이재철 사무국장은 "국민의 80%는 병원 장례식장에서 상을 치른다" 고 말한다.

2000년 현재 전국에 병원 장례식장이 3백65곳, 일반 장의업소가 1천여곳 있으며 전문 장례식장도 벌써 11곳이 생겨나 성업 중이다. 장의사가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주는 시대가 된 것이다.

호상소 설치에서 상복을 비롯한 장례물품과 접대음식, 고인에 식사를 올리는 상식에서 발인제, 봉분제에 이르기 까지 장의사가 도맡아 처리해준다. 상가의 역할은 빈소를 지키고 조문객을 접대하는 것으로 대폭 축소됐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게 유지되는 관습은 부의금 접수와 밤샘 조문객 접대다. 그러나 조문객은 망자에 대한 추억을 나누기보다 그들끼리 안부를 묻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예전 상민들이 투전판을 벌였다면 지금은 고스톱을 치는 조문객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기간은 대부분 3일장이다.

탈상도 1백일에서 49일, 1개월로 줄어들더니 이제는 삼우제만 마치면 바로 탈상을 하는 사람들도 30~40%에 이르는 것으로 장의업연합회측은 추산하고 있다.

화장도 급속히 늘고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화장하는 비율은 98년 25%에서 지난 2월 현재 55%로 급증했다. 국토의 묘지화를 방지하는 바람직한 추세지만 배경은 그렇지 못하다. 불교신자나 애국심이 갑자기 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묘지난과 성묘 등 부담을 피하려는 편의주의가 겹쳐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요즘의 장례풍습은 전통과는 완전히 단절돼 있다. 절차 속에 숨어있던 효도와 조상숭배의 정신은 찾을 길이 없다. 장례업자의 상업적이고 획일화된 절차에 유족들은 끼어들 공간이 없다" 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장철수 교수(전통문화학부)는 말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느리게 변하는 것이 장례의식인데 한국은 너무나 급속하게 변했다는 데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하고 있다. 이는 체면을 중시하는 공동체 사회에서 실리와 편의를 우선하는 개인주의 사회로 그만큼 빠르게 바뀌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업화.서구화.핵가족화.아파트 문화가 그 배경이다.

상여를 모셔두는 곳집, 장례를 위한 계조직, 호상을 서고 전범을 지도할 집안어른 등으로 상징되는 농촌 공동체 사회와 유교문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장철수 교수는 "장례는 조문객과 친족집단 사이에서 상주가 고인의 지위와 역할을 계승한다는 점을 인정받는 통과의례의 의미가 컸다" 고 지적하고 "이제는 친족집단이나 공동체 내의 지위승계가 무의미해져 버린 데 전통단절의 주된 원인이 있을 것" 이라고 해석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정종수 박사와 김시덕 연구원은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와 예를 내세운 의례진행은 대부분 직장에서 생활하는 개인으로서는 배우기도 감당하기도 어렵게 됐다. 전통의례의 절차와 의미를 배울 기회도 없다. 이에 따라 전문 장례업자가 이 기능을 대신하게 된 것" 이라며 "이와함께 공동체 의식.효도 정신 등을 배울 기회도 사라졌다" 고 진단했다.

국내학자들의 비관적인 견해와는 다른 해석도 있다.

12년째 한국에 살고있는 테데스코 프랭크 교수(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 협동과정)는 "미국에는 없는 좋은 풍습" 이라고 말한다. 삼일장에 걸친 조문과 접대, 음식과 술자리는 가족과 친지들이 고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추스를 시간과 여유를 준다는 것이다.

수많은 장례식에 문상을 갔다는 테데스코 교수는 "조문객들이 오랜만에 만난 기회에 인사와 대화를 나누고 사회적인 의사소통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 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살아 생전에 미리 수의를 만들어두는 풍습은 서양과 달리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고 평가했다.

일본의 장례식은 우리보다 더욱 간소하다. 전문 장례식장을 예약해 친지들에게 '6월 10일 18시' 라고 통지해서 1~2시간 동안 '법요의식' 을 치르는 게 전부다. 스님의 독경 속에서 한 사람씩 차례로 국화꽃을 놓고 묵념을 한 뒤 상주와 인사를 한다.

조문객은 부의금을 내고 다과를 대접받거나 찻잔, 우산 등의 답례품을 받고 돌아간다. 영구차의 99%는 화장장으로 직행한다. 슬픔을 함께 할 공간은 거의 없다.

'의미가 빠져버린 형식적인 전통' 이라도 외국보다 좋은 점이 많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런 것이 선조들의 지혜에 따른 작은 음덕인지도 모른다.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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