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클럽] '한국인의 사랑' 전하는 메신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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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글로벌 시대를 맞아 국내에는 87개국에서 나온 외교사절을 비롯해 상사원, 은행원, 강사 등 많은 외국인들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국을 일시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숫자 또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한국을 찾는 이유, 이곳에서 느끼는 매력 등 '한국생활 25시' 를 매주 한차례 다양한 포맷으로 소개합니다.

주한 이스라엘 대사 아리에 아라지씨의 부인 루트 아라지(53)여사는 맹렬 커리어 우먼이다.

남편 아라지 대사를 내조하면서도 본국 신문사 특파원, 주재국 대학교 교수로 다양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아라지 여사가 최근 또한번 '일' 을 냈다.

주옥같은 한국의 명시(名詩) 60편을 히브리어로 번역해 자국(自國)에서 출간한 것. '한국인의 사랑' 이라는 제목의 이 시집은 7일부터 10일간 이스라엘에서 열리는 책 주간 행사에 전시됐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남편을 따라 미국.일본을 거쳐 1995년 한국에 왔다.

일본 체류 중 이스라엘의 유력일간지 특파원으로 활동한 바 있는 아라지 여사는 한국에 도착한 직후 건국대 교수 공채에 응시, 히브리과 교수로 채용됐다.

이 시집에는 김소월, 한용운, 서정주, 김춘수, 조병화, 김남조, 고은, 김지하, 신경림, 정현종씨 등 기라성 같은 한국시인 15명의 작품이 풍속화와 함께 수록됐다.

"한국인의 정서와 풍경은 물론 역사까지 함축하고 있는 시집이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한국을 비춰주는 '창' (窓)이 됐으면 합니다.

특히 한용운 시인의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와 같은 구절은 이스라엘 국민들의 정서에 와닿을 것으로 확신해요. " 아라지 여사가 시집을 만들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그녀는 98년 자신의 강좌인 '현대 히브리 문학비평' 시간에 한국의 시들을 히브리어로 번역하는 과제를 냈다.

며칠 뒤 학생들이 가져온 번역물을 본 그녀는 한국 시들의 섬세하면서도 오묘한 표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특히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하는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 과 '남들은 자유를 사랑하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합니다' 라는 한용운의 '복종' 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학생들의 과제물을 수차례 음미한 끝에 소책자로 만들어 이스라엘의 지인들에 돌렸고 책자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이스라엘 여성친선협회 정광모(鄭光謨)회장은 아예 정식으로 출판할 것을 권했다.

결국 아라지 여사는 99년 3월부터 새로 번역작업에 착수했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소장그림을 시집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협력했다.

"한국 시에서는 사랑의 범주가 연인 뿐 아니라 자연, 인간, 조국까지 다양합니다. 한국인의 정신을 함축적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점이 매력의 포인트 같아요. "

이달말 임기를 다하는 남편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갈 아라지 여사는 "외교관 부인으로 안주했으면 한국을 겉으로만 보게 됐을 것" 이라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진짜 한국생활을 체험했다" 고 환하게 웃는다.

그녀는 요즘 서정주의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에 흠뻑 빠져 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 하게/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세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라는 싯귀가 한국과 석별을 앞둔 그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라며.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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