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의장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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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신임 이만섭(민주당)국회의장은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 다음으로 다선(8선)이다.

국회의장은 두번째다. 그런 행운은 고참 우대의 '국회 문화' 덕분이기도 하지만 정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과 처세의 성과라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첫 국회의장은 김영삼(金泳三)정권 때 했다. 재산공개 파문으로 물러난 박준규(朴浚圭)국회의장의 후임(잔여 임기 1년2개월)으로 YS는 그를 지명했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 아래서 그 자리에 뽑혔다. 정치적 적대관계였던 두 金씨 진영에 들어가 입법부 수장의 지위를 따낸 것이다.

그것도 YS와 같은 당을 한 지 1년 만에, DJ 진영으로 옮긴 지 1년9개월 만이다. 두 金씨 쪽으로 가는 李의장의 선택은 미묘했고, 비판이 있었지만 행운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은 이랬다. 1988년 13대 때 대구 달서에서 정치 신인(김한규)에게 밀려 떨어졌다.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 때문에 복귀가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92년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그를 민자당 전국구의원으로 불렀고, 대권후보 파문 때 그는 YS 쪽에 서면서 재기의 발판을 다진 것이다.

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 불복한 이인제(李仁濟)후보와 함께 그는 국민신당을 만들어 간판(총재)역을 했다. 대선 패배로 이것은 실패한 선택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98년 9월 국민회의에 입당한 뒤 신속하게 중심부(총재권한대행)를 차지했다. 이런 새 출발에는 '오뚝이 생존력' 의 면모가 드러난다. 반면 그런 노련미는 줄타기와 과욕의 논란을 낳았다.

李의장은 이런 평판을 부인한다. 93년 12월 예산안 강행처리 요구를 거부해 YS와 사이가 틀어졌고, 후반기 의장직을 맡지 못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가 5일 "(김대중)대통령의 뜻이라 해도 날치기를 하지 않겠다" 고 다짐한 것은 이런 과거를 염두에 둔 듯하다.

그가 금배지를 처음 단 것은 6대 국회 공화당 전국구(31세)로다. 당시엔 젊음과 기자 경험이 합해져 '여당 내 야당' 을 한다는 의무감과 강기가 있었다.

3선 개헌에 끝까지 반대했고 이 바람에 70년대 9년간 정치방학을 보냈다.

▶대구(68)▶대륜중.연세대 정외과▶동아일보 기자▶공화당 당무위원▶국민당 총재▶국회의장▶신한국당 대표서리▶국민신당 총재▶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이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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