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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등 석학 24명이 쓴 '시간 박물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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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시간은 태초부터 있었다.

하지만 한 철학자가 '시간의 발견이야말로 인류 최대 업적' 이라고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이 시간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종교.철학을 발전시키지 않았다면 시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새천년의 전환기를 맞아 시간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 지금 시간이 각기 다른 문명에서 인간의 삶에 끼친 영향을 고찰하는 책이 나와 관심을 모은다.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와 예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 등 과학.예술.역사.철학.문화 같은 다양한 분야의 세계적 석학 24명이 함께 펴낸 '시간 박물관' (김석희 옮김.푸른숲)이다.

이 책은 새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와 국립해양박물관이 함께 기획한 '시간 이야기' 특별전(지난해 10월부터 오는 9월까지 전시)의 도록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만큼 석학의 글을 뒷받침하는 시간과 관련한 4백여점의 유물.작품 사진이 풍성하게 수록돼 있다.

옮긴이의 설명대로 '시간의 창을 통해 바라본 인류문명사' 인 이 책은 인류 문명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전개해온 '시간' 의 모든 요소를 비교문화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에코의 서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시간의 창조와 측정.묘사.체험.종말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시간의 창조' 에서는 문화별로 다른 시간에 대한 견해를 창조신화를 통해 살핀다. '시간의 측정' 에서는 인류가 시간을 체계화하고 이를 삶에 적용하느라 시도한 다양한 노력과 그 결과물인 달력.시계의 발달사를 보여준다.

세계 각국에서 모은 희귀한 시계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또 인도.중남미.이슬람.중국.일본 등 각 문화의 시간 개념도 알아본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시간의 묘사' . 예술가들이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표현하려 했는지를 밝힌다. 이 책에 따르면 세계 모든 문화를 통틀어 시간을 의인화한 것은 단 두 개 뿐이다. 중세를 거쳐 '시간 영감' 으로 발전한 그리스.로마 신화의 크로노스와 중국의 '장수의 신' 인 '수로' (壽老), 혹은 '수성' (壽星)이다.

그러나 시간 개념, 혹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간의 종말을 다룬 미술작품은 많다. 대표적인 작품이 르네상스시대 화가 티치아노의 '분별의 알레고리' 다.

인생의 노년.중년.청년의 세 단계를 한 캔버스 안에 표현한 것. 각 시기를 나타내는 얼굴을 그리면서 표현양식도 달리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과거.현재.미래의 세 부분으로 이해했던 시간을 세 얼굴로 표현하는 전통은 이전부터 있기는 했다.

한편 덧없음을 의미하는 '바니타스' 의 형상화도 눈여겨볼 만 하다. '바니타스' 는 시간의 종말에 대한 의식을 형상화할 때 자주 나오는 소재. 15세기에 처음 등장했다.

정물화 안에 인간의 해골이나 까맣게 탄 초 심지 등을 그려넣는다. 16세기에는 피테르 브뢰헬의 '죽음의 승리' 처럼 개인적 형태만이 아니라 웅장한 서사적 형태도 취한다.

17세기에 이르면 '바니타스' 가 죽음을 직접 묘사하는 형식으로 바뀐다. 죽음을 눈앞에 둔 모델을 완벽하게 그려 겉모습이나마 영원히 남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예술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시간의 체험' 은 삶을 지배하는 또 다른 유형의 시간을 분석한다. 다양한 통과의례 문화나 노령.죽음이 그것. 의학에서 시간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다. 근대 초기까지 노령 문제는 의학자보다 철학자들의 문제로 다뤄졌다.

곰브리치는 '기념일의 역사' 라는 글에서 '천제 관측이라는 창조적 업적이 없었다면 달력도 없었을 테고, 모든 공동체의 달력에 적혀 있는 기념일과 축제일도 당연히 없었을 것' 이라며 '수많은 업적과 사건이 잊힐 운명을 거부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공동체에 안겨주는 것이 기념일이기 때문에 기념일은 계속 늘어난다' 고 주장한다.

마지막인 '시간의 종말' 은 지구상 여러 문화가 시간의 종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시간은 인간을 뛰어넘는 대상이지만 시간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발명했고 이를 토대로 전혀 새로운 문명을 창조했다는 점을 이 책은 상기하게 한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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