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말로만 끝난 한나라 경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31일 오전 9시30분 국회 145호실.

국회의장 선거에 내보낼 후보를 뽑기 위한 민주당 의원총회장. 여당의 국회의장 후보 경선이 처음인 때문인지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의원들 대부분의 표정엔 긴장과 가벼운 흥분이 섞였다.

사회를 맡은 정균환(鄭均桓)총무가 먼저 "후보를 직접 뽑는 게 민주적" 이라고 강조했다. 대부분 의원들은 "투표가 바로 시작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전날 의총에서 '지도부 지명' 을 주장했던 이윤수(李允洙)의원이 나서 "집권 여당이 무작위로 투표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며 투표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 분위기가 다르게 돌아갔다.

김영배(金令培)고문이 앞으로 나왔다. 金고문은 "투표만이 능사가 아니다" 고 말했다.

그는 이만섭(李萬燮)고문과 함께 유력한 국회의장 후보로 거론돼 왔고, 본인도 의장을 맡고 싶다는 희망을 표시해 왔다.

때문에 그의 발언은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표가 분산된 채 후보가 선출된다면 결코 명예롭고 품위있는 후보가 될 수 없다. 당을 위해 李고문을 만장일치로 추대해달라" 고 앞장서서 '추대 분위기' 로 몰아갔다.

전날 경선론을 내놓았던 초선 의원들이 반발했다.

정범구(鄭範九).장성민(張誠珉)의원은 "민주적인 절차가 중요하다" "야당도 총재.부총재를 뽑으면서 새 천년을 축제로 시작하는 데 왜 경선을 안하느냐" 며 투표강행을 주장했다.

격론이 계속됐다. 중진인 이협(李協)의원까지 나서 "경선하자고 해놓고 뒤집으면 공당으로서 문제가 있으니 결정한 대로 투표하자" 고 강조했다.

결국 '자유투표' 와 '구두로 추천된 후보에 한해 투표에 부치는 안' 을 놓고 거수로 투표에 부쳤다. 후보 추천안이 37대 23으로 채택됐다.

나머지 의원들은 기권했다. 그런데 李고문 외에 아무도 추천되지 않았다. 李고문이 후보로 확정된 것. 전날 '진짜 당내 민주주의' 니 '최초의 여당 국회의장 경선' 이니 하며 요란스럽게 떠들던 모습과 달리 싱겁게 끝났다.

고위 당직자는 "경선을 거치지 않아야 한나라당 후보와 겨루는 본선 경쟁력이 생긴다는 논리가 먹혀들었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당직자는 " '경선 문화' 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당 민주화의 수준.한계를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며 아쉬워했다.

이정민 정치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