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먼저 떠난 자들이 보내온 편지를 통해서였다. 물론 검열을 거친 편지들은 하나같이 ‘지상낙원’과 김일성 장군의 위업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남은 가족들은 사전 약속한 암호로 행간의 의미를 읽었다. “내가 도착한 뒤 편지를 세로로 써 보내면 남은 식구들도 하루빨리 북조선으로 오고, 가로로 써 보내면 절대로 오지 말라.” 남은 가족들이 받은 편지는 불행히도 가로쓰기였다. 이런 편지도 있었다. “여기서의 생활은 일본의 ○○○처럼 풍요롭습니다.” 편지에 씌어진 ○○○는 빈민가의 지명이었다.
똑같은 현상을 놓고 관점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붙이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 시작된 이 사건을 놓고도 ‘귀국사업’(북한 정부), ‘귀국 운동’(조총련), ‘귀환 업무’(일본 정부) 등으로 이름이 다르다. 한국 정부는 예나 지금이나 ‘북송’이란 용어를 쓴다. 오매불망 그리던 조국을 찾아간 것(귀국)이 아니라 강요에 의해 북한으로 보내졌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어느 하나 진실을 반영한 용어는 아니라고 본다. 뒤늦게 발굴되고 있는 관련 자료들에 따르면 이는 거대한 사기에 가깝다. 체제 우월성을 국제적으로 과시하고 싶었던 북한과 조총련, 범죄율 높고 사회주의에 경도된 잠재적 위험집단을 ‘정리’하고 싶었던 일본 정부 모두가 주범과 종범, 공범으로 가담했다. 이런 상황에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던 당시의 한국 정부도 방조범에 가깝다. 지상낙원을 찾아갔다가 생지옥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9만3000명의 일그러진 삶을 지금에 와서 누가 보상할 것인가.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