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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린 15대 국회 뭘 남겼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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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5대 국회는 격동의 무대였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 정권교체를 경험한 기록을 세웠다.

3金정치의 마지막 불꽃이 타올랐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도 15대에서 정치인으로 데뷔했다. 이 기간에 국민의 국회 불신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는 새 정치의 열망으로 이어졌고, 역설적으로 시민단체와 386세대의 활동공간을 마련해주었다.

1996년 4.11 총선 결과 김영삼(金泳三.YS)대통령의 신한국당(1백39석)과 김대중(金大中.DJ)총재의 민주당(79석).김종필(金鍾泌.JP)총재의 자민련(50석)은 1여(與)-2야(野)의 분할체제를 구축했다.

국회 개원식에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로 21세기의 전당이 돼달라" 는 YS의 인사말은 실현되지 않았다.

과반수 의석 확보를 위한 여당의 집요한 작업과 이를 '인위적 정계개편' 으로 규정한 두 야당의 거센 반격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YS의 정권 재창출 의지와 DJ의 대권집념, JP의 캐스팅보트 역할론은 여야대립을 가파르게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98년 2월 25일)으?15대 후반부의 모습은 달라졌다. 하루아침에 여야가 뒤바뀐 정치환경에 적응하는 데 정당지도자와 국회의원들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집권경험이 있는 야당' '소수파 공동여당' 의 새 실험은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다수 야당의 반대에 부닥쳐 金대통령은 'JP 총리의 국회임명동의' 를 받는 데 6개월이나 걸렸다.

공동여당은 수(數)의 한계를 야당의원 빼가기로 극복하려 했다. 한나라당은 자신들의 생존을 내세워 현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당리당략에 빠진 소모적 국회라는 비판은 이때부터 집중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회창 총재의 새로운 야당체제 역시 세풍(稅風).총풍(銃風)사건의 시련을 극한적인 대여투쟁으로 뚫고 나갔다.

집권세력은 국회의원을 압박하는 여러 수단들을 동원해 끊임없이 정계개편 의지를 드러냈다. 99년에 들어서서 '국회 529호 야당의원 진입사건' '3일 연속 안건 변칙처리' '옷로비.파업유도 청문회' 등으로 여야가 충돌했다.

15대 국회가 '식물 국회' 라는 오명을 들은 이유가 여야간 극단적 불신 탓임을 의원들도 인정하고 있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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