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386 정치인 5·18 전야 술판에 부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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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80년대 그 동토(凍土)의 산하에, 배운 자들 가진 자들 모두 비겁하게 침묵하고 있을 때 그대들은 맞섰다.

맨살로 모진 삭풍을 견디느라 잔가지 허다히 부러지고 등걸에 깊은 생채기 나면서도 가슴속에 새벽하늘의 '그믐달 같은 낫 하나 시퍼렇게 걸어놓고' (김남주 '한겨울에' 중)….

'광주사태' 진상규명 하라며 전단을 흩뿌리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드디어 서울 미국문화원을 점거해 국민에게 알려지기 이전까지 '광주' 는 다만 음울한 암호였을 뿐이다. 비로소 햇빛 아래 드러난 광주를 두고 그대들은 감옥으로 행진해 갔다.

황망한 그대 어머니들 눈물바람 잠재우고 독재의 하수인들에게 석방을 구걸하는 대신 자식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나서기로 일대결심하고 마침내 김치 담그던 손으로 유인물을 뿌리고 거리시위에 이르기까지 안내해준, 그리고 지금은 너무 유명해진 '민가협'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창립선언문을 쓴 총무로서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그대들을 응원하기 위해 무수히 원천봉쇄된 캠퍼스의 뒷담을 넘고 때로 변장으로 수배자를 만나다가 마침내 재직하던 학교에서 해직당하고도 기쁨에 겨워 그대들을 뒷바라지했던 누나로서 감히 꾸짖고자 한다.

그대들은 가슴에 빛나는 금배지를 달고 5월정신을 모독했다. 그대들이 술판을 벌인, 20년 전 그 시각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전국 대학은 무장군인에 의해 점령되고 그대 선배들은 머리에 권총이 겨누어진 채 생사를 알 길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갔다.

그대들은 벌써 '오월의 노래' 를 망각했다. 오월 그날이 다시 왔는데 금남로의 부릅뜬 두 눈은커녕 욕된 역사의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나갈지 번민하지 않는다.

그날, 오히려 광주는 시끄러운 음악조차 들리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버젓이 5.18 신새벽에 노래하고 춤추었다.

'가슴에 위대한 훈장을 달고 저마다 사월을 모독하는데 이젠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 나는 그만 한세대 전 시인(박봉우)의 자조를 반복하고 싶어진다.

또한 그대들은 너무 쉬이 현재의 영광에 자족한다. 80년대 내내 수천명의 그대 선후배들이 그대들보다 훨씬 더 오래 감옥에 유폐됐으며, 때로 노동현장에서 땀 흘리고 손가락이 잘렸으며 더러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숨져갔다. 그들의 무덤에는 한동안 꽃도 십자가도 없었다.

그대들의 영광은 온전한 그대들의 것이 아님을 부디 잊지 말라. 불행하게도 정치시장에서 상한가를 치고 있는 386을 향해 무늬만 젊은 피요, 행동은 썩은 피라고 질투에 불타는 비난을 날린 자들의 예언대로 그대들은 행동하고야 말았다.

민주주의를 향한 그대들의 타협없는 비판정신과 원칙주의의 칼날은 녹슬었다.

유신독재 이래 서너차례씩 감옥행을 하면서 일관된 정치적 행보를 해온 선배들이 당의 안팎에서 겪는 소외와 배척을 잘 알면서도 그대들 중 누구도 아무런 연대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국민의 열망인 정치개혁이나 정당민주화를 위한 노력보다는 자신들의 '간택' 에만 매몰되었다는 비판을 들어 마땅하다.

청춘의 일부를 바쳤으되 '지상에서 먹고 살 만한 동네' 로 상승한 그대들에 비해 인생 모두를 바치고도 아직 '지하로 흐르는 물' 로 정처없는 곤핍한 삶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결코 그들이 못나서라고 생각지 말라. 역사에 배반당하고 정치에 희생당한, 순결하지만 바보같은 인생은 그대 눈 앞 도처에 널려 있다.

그대들의 영광 저 뒤켠에는, 계엄군의 캐터필러 아래로 산화해간 시민군의 넋과 독재의 마수에 꽃잎처럼 스러진 혼령이 아직 구천을 맴돌고 있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여전히 우리의 희망이다.

5.18을 '남의 집 제삿날' 로 여기는 세대들이 투표를 거부하는 이 정치혐오의 시대는 더욱 그대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너무 많고 그대들은 이제 막 새내기 청춘이다.

봄철의 산불도, 여름날의 홍수조차 정치인 탓으로 돌려야 직성이 풀리는 맹목적 정치불신은 그것 자체가 재앙이기에 민족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을 꿈꾸는 우리는 결코 희망을 접을 수가 없다.

아직 우리 희망의 거처인 그대들은 결코 찰나의 영광에 도취할 때가 아니다. 겸허하게 자신을 오랫동안 뒤돌아 보라.

유시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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