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돋보기] “도주 고의성 없으면 뺑소니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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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교통사고를 낸 사람이 피해자를 구호한 뒤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떠났더라도 무조건 뺑소니(도주차량)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임모(46)씨는 지난해 10월 승합차를 운전하다가 자전거를 타던 여성(51)을 치어 전치 2주의 부상을 입혔다. 사고 직후 임씨는 “아이들을 돌보러 집에 가야 한다”는 피해자를 집까지 바래다 줬다. 치료비 명목으로 10만원을 피해자에게 건넨 임씨는 “내일 오전에 함께 병원에 가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임씨는 자신의 연락처와 인적 사항은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튿날 보험사에 신고 전화를 하는 과정에서 “10만원을 줬으니 합의한 것 아니냐”는 잘못된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임씨는 피해자의 신고로 경찰과 검찰의 조사를 받고 뺑소니 혐의로 기소됐다. 1심 법원은 “사고를 내고 구호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점이 인정된다”며 벌금 300만원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은 “도주차량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1심을 깨고 공소 기각 판결을 했다. “임씨가 연락처 등을 알리지 않은 점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구호 조치를 취했고, 신고 이후에 합의한 점 등을 비추어 볼 때 도주의 고의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대법원은 2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14일 밝혔다. 신동훈 대법원 홍보심의관(판사)은 “‘도주차량에 의한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죄(뺑소니)’는 사고 후 조치를 다하지 않고 자신의 연락처 등을 알리지 않은 경우에 성립하는데, 이때 고의성이 인정돼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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