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미술의 매력, 제2의 외교 인생을 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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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호 08면

1‘오론’ 조상 인물상. 나이지리아, 나무, 1m56㎝. 이그보 부족의 오론 마을에는 전신 조상 조각상을 만들어 사당에 모셔두는 풍습이 있다. 틀어올린 화려한 머리, 입체감 있게 표현한 앞가슴, 두 손에 주술봉을 들고 있어 마을의 무속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여인 인물상. 우간다, 나무·금속장식, 1m45㎝. 우간다 조각가 Mugalula-Mukiibi의 작품. 서구적 개념의 미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다.3 이페 청동 두상. 나이지리아, 청동, 35㎝. 요루바 지방 이페왕국에서 이페왕의 장례용품으로 사용됐다. 얼굴의 긴 줄무늬는 왕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묘사한 것이고, 입 주위의 구멍은 수염을 달기 위한 것이다. 아프리카에도 뛰어난 청동 주물 기술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검은 대륙(dark continent)’. 19세기 이전, 유럽인들이 ‘미지의 땅’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 수식어는 오늘날까지도 미개·기아 등의 부정적인 의미를 담은 채 아프리카를 지칭한다. 그러나 예술에 관한 한 아프리카는 어둡지 않다.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아프리카 미술을 빼놓고는 현대 미술을 논할 수 없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도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강원도 영월에 지난 5월 아프리카미술박물관을 개관한 조명행(68) 전 칠레 대사도 그 붐에 일조했다. 1996년 한국아프리카협회(KOAFA)를 만든 뒤 협회 이름으로 아프리카 미술 조각전을 다섯 차례 열었다. 모두 그의 수집품이었다.

이경희 기자의 수집가 이야기 - 조명행 영월 아프리카미술박물관장

“나이지리아 대사로 있던 92년 마음에 쏙 드는 조각품을 접했어요. 너무 비싸서 망설이다 두 달간 벼르고 별러 돈뭉치를 가방에 집어넣고 찾아갔죠. 그런데 누가 내 눈앞에서 그걸 사가더군요. 그 뒤부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현찰을 두둑이 지니고 다녔죠. 미술에 거의 무지한 상태였는데, 아프리카 조각품에 심취하는 바람에 한 점 두 점 모으다 이렇게 됐네요.”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도 규모가 큰 나라고 아프리카 고유 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곳곳의 미술들이 모여들었기에 여러 부족의 작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마스크는 3000여 부족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신비롭고 표현이 특이한 게 좋아 모으기 시작했지만, 점차 그냥 수집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떤 부족이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가를 추적하면서 가급적 각 부족의 대표성이 잘 드러난 조각과 마스크·인물상을 모았죠.”

그렇게 수집한 작품이 자잘한 장신구류를 제외하고도 500여 점에 달한다. 2층짜리 폐교를 활용해 리모델링한 박물관은 그리 크진 않지만 채워 넣은 작품 수준이 만만치 않다. 1층은 그가 수집한 아프리카 전통 조각 미술품이, 2층은 아프리카 16개국 주한 대사관에서 출품한 문화품들이 전시돼 있다. “올해 개관식 때 각국 대사들을 비롯해 대사관 전 직원 60여 명이 참석했어요. 저는 외교관 출신이라 아프리카의 문화를 알리고 이해시키려는 목적에서 박물관을 열었어요.”

그는 박물관이 아프리카 문화의 메카가 되길 바랐다. 대사관들도 그렇게 해주기로 약속했단다.“아프리카라고 하면 옷도 안 입고 전통 춤이나 추고 이상한 거나 먹는 것으로 아는데, 그게 아니에요. 수도에 가면 서울 못지않은 현대식 빌딩이 있고 현대적 모습의 도시가 있어요. 다만 전체적으로 경제력이나 교육수준이 떨어질 뿐이죠.”

전시실 한쪽 벽에는 3분의 1로 축소한 밀로의 비너스상이 놓여있다. 그 바로 옆에 아프리카 현대 작가의 여인상을 놓았다. 관객들에게 유럽의 비너스와 아프리카의 비너스 중 무엇이 더 아름다우냐는 질문을 던지는 게다. 아름다움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할까. 인체의 실제 비율에 들어맞지 않으나 특징을 잘 살린 아프리카의 비너스가 더 눈길을 끈다. 그러나 검은 여인이 더 아름답다고 선뜻 인정하자니 머릿속이 혼란해진다. 편견 때문일 터다.

“아프리카 미술은 누구든 한번쯤 마음속으로 느껴봤을 법한 것을 기교 없이 자연스럽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은 과장해서라도 뚜렷하게 보여주고, 중요치 않은 부분은 과감히 생략해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신세계와 마음대로 결합시킨 거죠.”

가령 임신을 기원하는 용도의 여인상은 볼록 나온 배를 강조하는 대신 팔은 생략하거나 아주 작게 표현한다. 미술 용어로는 ‘데포르마시옹(일탈)’이다. 추상적인 아프리카 미술은 서구 미술가에게도 영향을 줬다. 가장 흔히 거론되는 것이 피카소다. ‘아비뇽의 아가씨들’ ‘게르니카’는 아프리카 마스크의 영향을 받았다. 한 사람의 얼굴에 정면에서 본 눈과 측면에서 본 눈을 한 평면에 그려 넣는 등 사물의 보이지 않는 면까지 표현하는 입체주의도 결국 아프리카 미술에서 비롯되었다.

“야수파·초현실주의·다다이즘 등 추상적인 모든 표현은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박물관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다시 생각하고, 그들을 편견 없이 만날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1년에 한 번쯤은 각 대사관의 협조를 받아 아프리카 축제를 열 계획이다. 아프리카 관련 단체의 사진도 전시할 거란다. 그에게 수집이란 민간 외교인 셈이다. 2000년 공직에선 물러났지만 평생 은퇴할 수 없는, 천생 외교관이었다.


중앙일보 10년차 기자다. 그중 5년은 문화부에서 가요·방송·문학 등을 맡아 종횡무진 달렸다.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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