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한국유리공업(주) 창업자 이봉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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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유리 한장 더 만들고 옷감 한필 더 파는 것 보다는 반짝이는 젊은 눈망울을 지켜보는 것이 좋다. "

지난 14일 별세한 구리(九里) 이봉수(李奉守.83)씨가 생전에 즐겨했던 말이다. 그는 국내 굴지의 판유리 제조업체인 한국유리공업㈜의 공동 창업자이자 신일기업.한국산업가스 등 중견 업체들을 거느린 기업가였다.

그러나 신일고등학교 동문 심우(沈愚.48)씨는 "고인은 이 땅에 참교육의 터전을 마련하려고 애썼던 교육자로서의 모습이 더욱 깊게 각인돼 있다" 고 말했다.

1966년 李씨가 설립하고 이듬해 첫 신입생을 받은 신일중.고등학교는 파격적인 운영을 통해 단시일내 명문교의 반열에 들었다.

수유리 일대 총 12만평의 부지에 지어진 이 학교는 개교와 함께 교육계의 필수 견학코스가 될 만큼 획기적인 시설을 갖췄었다. 수세식 화장실, 난방용 래디에이터, 그리고 장애인용 경사로 등의 시설은 당시로는 전례가 없던 것들이었다.

또 李씨는 전국 각지 명문고를 찾아가 교문 앞에서 학생들을 붙잡고 물어가?뛰어난 교사들을 초빙, 영재교육의 여건을 조성했다.

67년 이 학교에 부임한 주명갑(朱明甲.67)전 교사는 "고인이 지은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이란 교훈 아래 또랑또랑한 학생들과 함께 지낸 그 때가 교사로서의 보람을 가장 깊게 느낀 시절" 이라고 회고했다.

李씨가 교육에 뜻을 두게 된 것은 48년부터. 17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시절부터 장사를 시작, 해방 전후 이미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의주에 차렸던 '협창' 이라는 포목점에서 나온 옷감들은 만주일대와 부산까지 팔려나갔다. 그러나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상황이 급변했다.'자본가' 로 낙인 찍히면서 상점이 몰수당해 무일푼으로 월남했다.

李씨는 서울 자유시장에서 그간 쌓아온 신용 하나만으로 포목상을 다시 일으켰다. 이후 불과 4년만에 무역업체인 신일기업을 비롯, 대한모방.동아견직 등 당시 손꼽히는 제조업체들을 창업했다.

"아버님은 재기 과정에서 '사람의 재산은 뺏을 수 있지만 지식은 뺏을 수가 없다' 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고 장남 이세웅(李世雄.61)한국유리 회장은 말했다.

57년 같은 평안도 출신 기업인 최태섭(崔泰涉)씨와 공동으로 유엔한국부흥기구(UNKRA)에서 건립하던 한국유리를 인수, 현재의 사업기반을 잡았다.

60년대 중반 이 사업이 궤도에 올라서자 그는 더이상 기업 확대에 매달리지 않았다. 사업가로서 추진력을 더 보여줄 만할 때도 李씨는 "빈털털이로 월남, 그만큼 벌었으면 됐다" 라고 말하며 자제했다고 李회장은 말했다.

대신 고인은 육영사업의 오랜 꿈을 실천에 옮겼고, 이후 다른 직책은 다 포기해도 신일학원 재단 이사장직은 작고 때까지 지켰다.

李회장은 부친의 삶에 대해 "아호와 같이 '구리(九里)' 의 '도(道)' 를 다했다" 고 요약했다. 구리는 고인의 고향인 의주읍 구성동을 지칭하는 말. 욕심이 충족되는 '십리' 를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돈도 벌고 하고 싶은 일도 하며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았다" 는 것이다.

왕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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