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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칼럼] 남은 자의 부끄러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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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시인 보들레르는 말했다.

거울에 언제나 자신의 내면을 비춰보면서 부단한 자기 성찰을 통해 엄격함을 유지할 줄 아는 멋쟁이가 진정한 댄디라고. 환란과 격변의 시절에 좋은 스승과 똑똑한 제자들과 함께 역사학 연구에 뜻을 두어 여한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자부했던 '범부(凡夫)' 민두기(閔斗基)교수는 댄디였다.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다.

중학시절 그의 선배가 남긴 '내몫까지 공부해달라' 는 부탁을 가슴에 새기고 평생을 공부로 일관한 공부벌레였다.

그는 광주에서 중학을 마친 뒤 부산에 피난 온 서울대에 입학한다.

책보따리를 등에 지고 유학의 길을 떠난, 그가 말하는 '부급(負□)' 의 시절이다.

전후 어수선한 피난대학에서도 그는 나루터를 찾는 사공마냥 책속에 파묻혀 '문진(問津)' 시절의 대학생활을 보낸다.

이어 어렵사리 강사를 거쳐 대학전임으로 자리 잡으면서 혀로써 벌이를 하는 '설경(舌耕)' 40년 일생일업의 철저한 교육자와 연구자로서 길을 걷는다.

"숨돌릴 틈도 없이 달려온 예순고비/돋마루 걸터앉아 고개돌려 바라보니/회한(悔恨)이 안개되어 눈물 땀을 가렸다" 고 그 자신 술회할 만큼 교육과 연구에 전념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 만에 중국사를 배우려 대학원에 진학했다.

어영부영 대학원 학력이나 채우려 했던 직장 다니는 늙은 학생이었다.

첫날 수업이 閔선생 시간이었다.

5, 6명 학생이 앉은 강의실에서 선생은 느닷없이 '權아무개' 를 호명했다.

이미 잡지 편집자와 필자와의 관계로 친숙한 사이인데 뻔히 보면서 출석을 부르다니! 곧이어 강의 텍스트였던 청말(淸末)지식인 풍계분(馮桂芬)의 문집 번역을 지시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등교했던 늙은 학생은 그날부터 '閔총통' 의 밥이 되어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강의실에서 후배들과 밤을 새워 강독시간 준비를 하고 리포트를 써야 했다.

강의실의 그는 정말 '총통' 이었다.

안면몰수였고 한치의 실수나 잘못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몰아세우고 무안을 주었다.

그는 평생을 무서운 훈장으로 일관했다.

교실강의로만 끝나지 않았다.

학문적 열정이 있는 학생이면 유학을 주선했고 전공분야까지 선정해 후학을 키웠다.

전두환(全斗煥)정권 초기, 민청학련사건으로 복역했던 제자가 대학원 진학을 희망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대 학칙으론 입학불가였다.

閔선생은 한 사립대학에 그를 진학시키고 선생 스스로 그 학생의 '독선생' 이 되어 박사과정까지 지도했다.

이런 노력들의 결과가 짧은 기간안에 한국의 동양사연구 수준을 오늘의 자리에 오르게 한 공헌으로 빛나고 있다.

그는 중국사연구에서 세계가 알아주는 독보적 존재다.

서양연구자들이 중국의 전통과 근대화를 단절로 보는 데 비해 그는 정상적 역사발전의 단계로 보았다.

구체적 사료와 엄격한 고증을 거쳐 이를 입증하려는 노력의 결실이 그를 세계적 학자 반열에 오르게 했다.

그는 방학이면 해외 세미나 순방길에 올랐다.

그의 연구업적을 알리고 해외학자들의 연구를 수용하기 위한 기회로 삼았다, 그때면 으레 후학 교수들을 대동했다.

학문의 세계화에 동참시키려는 해외 전지훈련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어는 물론이고 독일인 교수를 만나면 독일어로, 일본학자와는 유창한 일본어로 대화를 하면서 후학들의 기를 죽이고 외국어의 필요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줬다.

95년 10월 그의 자작 연보는 단지 이렇게 적고 있다.

"5일부터 11일까지 고대 구로병원에 입원하여 체크를 하였다. " 그후 사흘 뒤 閔선생을 따라 나는 '21세기 한.중.일 관계 전망' 이라는 베이징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때 이미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직후였지만 내게 어떤 낌새도 비추지 않았다.

그후 백혈병 관련자료를 읽고 나름대로의 처방을 하며 스스로 항암제 주사를 놓으며 학문과 연구의 열정을 늦추지 않았다.

부음(訃音)을 듣기 전까지 그가 난치의 중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가족 이외는 별로 없었다.

그는 지독한 댄디였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댄디 보들레르를 이렇게 요약했다.

"자신의 육체, 자신의 행동, 자신의 감정과 정열, 요컨대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거울에 비추는 힘들고 엄격한 금욕주의자였다" 고. 이 시대의 흔치 않은 댄디 민두기 교수는 갔다.

"내려앉은 꽃잎모양/상장(喪章)과도 같이/나 이제/네 앞에 곱게 드리워지나니/오-내 임종(臨終)의 날은 언제라냐" 며 그가 애송했던 노천명(盧天命)의 시구처럼 그는 떠났다.

그를 아는 후학들에게 부끄러움만 남기며ㅡ.

권영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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