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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를 찾아서] 8.여주 신륵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여주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남한강의 큰 줄기인 여강(驪江). 예로부터 수려한 풍광으로 널리 알려진 이 강 왼편엔 나지막한 산이 있다. 봉미산(鳳尾山)이다. 그 자락에 신륵사가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 만든 거대한 일주문을 지나면 너른 마당이 펼쳐지고 강가 언덕 위에 정자와 함께 특이한 모습의 탑이 눈에 들어온다.

신륵사는 고려 때부터 '벽절' 이란 속칭으로 불렸다. 벽돌탑이 있는 절이란 얘기다. 신륵사 다층전탑은 벽돌탑(塼塔)이다. 전탑이 주류를 이루는 중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전탑이 거의 없다. 비교적 온전한 모양으로 남아있는 전탑은 이 다층전탑을 비롯해 5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시기적으로는 통일신라, 지역적으로는 경북 안동주변에 몰려 있다. 그래서 고려시대.경기지방에 만들어진 특이성이 이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탑 가운데 경주 분황사 탑처럼 언뜻 보기에 벽돌로 쌓은 것 같은 것이 제법 있지만 이는 돌을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은 것일 뿐 전탑이 아니다.

나아가 전탑이라도 기단은 물론 탑신 일부에도 화강암을 사용하는 등, 모든 것을 벽돌로 만든 중국의 전탑과 크게 다르다.

우리 민족 특유의 '돌에 대한 강한 애착' 이란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결론은 안 난 상태다.

창건연대가 분명치 않은 신륵사는 고려말 나옹화상이 이적(異蹟)을 보이며 입적한 뒤 크게 번창했다. 신륵사 경내로 들어서면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과 그 앞에 자리한 탑 하나가 보인다.

조선초기로 추정되는 이 다층석탑은 언뜻 보아도 화강암 석탑과 다른 모습이다. 이 탑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재질이 무른 만큼 장식이 화려하다. 특히 상층 기단에는 용과 구름무늬 등을 섬세하게 새겨놓았다.

극락보전 왼쪽으로 돌면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대사가 심었다는 잘생긴 향나무 뒤로 조사당(祖師堂)이 나타난다.

조선초기 건물로 추정되는 팔작지붕에 다포형식의 아담한 건물이다. 조사당 오른편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부도와 석등, 비석이 보인다. 모두 이 곳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을 기리는 것들이어서 당시 그의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부도가 서있는 위치는 오대산에서 봉미산으로 뻗어내려온 지맥이 정기를 그러모았다는 명당이다.

나옹화상의 부도는 널찍한 사각형 기단 위에 돌로 된 종(石鐘)을 얹어놓은 장중한 모습이다.

사발을 얹어놓은 듯한(복발.覆鉢)이런 부도는 인도탑의 영향을 받은 것. 조선시대 크게 유행한 석종부도의 연원이 바로 이 부도다.

앞에 놓인 석등 또한 특이하다. 화사석을 흔히 곱돌로 불리는 납석으로 만들어(나머지는 화강암) 비천상과 용을 정교하게 새겨놓았다.

특히 화창(火窓)윗부분에는 아랍계통의 섬세한 문양을 새겨놓아 고려의 국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법당과 불탑 사이에 놓이던 석등은 신라 말기 부도 앞에도 놓이기 시작해 이후 묘역 앞의 장명등으로 이어진다.

▶ 여주에 가면…

신륵사는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도 번창했던 절이다. 예종때 세종대왕의 능을 천하명당이라는 여주로 옮기면서(영릉.英陵) 신륵사를 원찰(願刹)로 삼았던 까닭이다.

영릉에는 능묘 외에도 기념관인 세종전이 있고 당시 과학 유물들을 복원.배치해 두었기 때문에 꼭 한 번 들려봄직 하다.

여주에서 답사지로 빠트릴 수 없는 곳이 고달사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중한 부도를 비롯한 여러 석물(石物)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조사를 위한 발굴조사가 진행중(6월말까지)이어서 답사시기를 그 이후로 잡는 게 좋겠다.

박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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