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무급 전임제 합의 뒤집을 거면 노사정 협의 왜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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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나라당이 그제 내놓은 ‘노동조합법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은 노사정(勞使政)이 어렵사리 마련한 합의안을 사실상 뒤집는 내용이라 원칙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무급(無給) 전임제에서 후퇴한 대목이 그렇다. 나흘 전 노사정 3자는 ‘모든 사업장에 무급제를 도입하고, 노조활동에 꼭 필요한 활동에 대해서만 임금을 지급(타임오프제)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타임오프제의 구체적인 적용범위는 시행령에 담기로 했었다. 그런데 한나라당 개정안에는 임금지급 대상 활동이 ‘통상적인 노동조합 관리업무’로 바뀌었다. 게다가 유급 전임제 존치를 연상시키는 애매한 표현도 담았다. ‘단체협약으로 정하거나 사용자가 동의하면 임금손실 없이 노조활동을 할 수 있다’는 대목이다. 이렇게 후퇴할 거면 노사정 협의는 무엇하러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경영계가 “사실상 무급 전임제 도입을 포기하자는 것”이라며 강력히 항의하자 한나라당은 “전격적인 도입으로 큰 타격이 예상되는 영세사업장을 감안한 것이며, 대통령령에 노조관리 업무를 구체적으로 정하면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눈 감고 아웅 하는 격이다. 노사가 단체협약에서 통상업무 범위를 노조활동 대부분으로 정할 경우 전임자들은 종전 임금의 상당부분을 받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령에 노조활동의 세부 사안을 일일이 담기도 어려워 제재의 실효성도 떨어진다는 게 노동법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더구나 사용자 동의를 전제한 유급 노조활동을 허용하게 되면 노노갈등이 심화될 공산이 크다. 강성노조들은 사용자를 압박해 유급 전임자 수를 늘릴 수 있지만 힘없는 노조들은 활동이 더욱 어려워질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노사문제 해결에 당사자 간 합의원칙을 주창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그 원칙을 스스로 깼으니 앞으로 한나라당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자유선진당이 “한나라당은 ‘양치기 소년’”이라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그 원인이 지난번 합의에 강력히 반발하는 한국노총 하부 조직들을 추스르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내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둬야 하는 정당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국민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정책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것은 책임있는 공당이 할 일이 아니다. 더구나 무급 전임제는 노사문화 선진화를 위해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도입해야 하는 제도라고 한나라당 스스로 주창해오지 않았던가.

우리는 직업 투쟁가들을 양산해 노사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유급 전임제를 전면 폐지해야 한다고 누차 지적해 왔다. 타임오프제를 도입하더라도 범위를 최소화하고 구체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그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법개정 시한인 연말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노사정이 애써 마련한 무급제 관련 원칙들은 국제기준과 우리 경제사정을 감안한 현실적 대안이라고 본다. 노사정 합의안대로 개정안을 다시 만들기 바란다. 그것이 “포퓰리즘에 의해 노사문화 선진화가 희생됐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