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광장] 노동절보다 커진 부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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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러시아의 5월은 축제와 연휴로 시작된다. 옛 소련 시절 노동자들의 최대 축제로 자리잡은 노동절(1일)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서 대규모 축하행사가 벌어지는 전승기념일(9일)까지는 어김없이 주말이 끼여있기 때문이다.

올해에도 러시아의 5월은 황금연휴로 시작됐다. 그러나 지난해와 달리 올해의 노동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영상 1도라지만 강풍이 텅빈 거리를 휩쓸고 다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모스크바.상트 페테르부르크.크라스노야르스크.극동 사할린 등 러시아 전역에서 약 17만명이 각종 기념시위와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트베르스카야 거리 등지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아 행해진 행사와 퍼레이드는 지난해에 비해 크게 쪼그라든 모습이다. 노조와 공산당이 주최한 몇몇 행사가 있었을 뿐이다.

전국민의 축일이었던 노동절이 이제는 노동조합과 공산당의 대정부 규탄시위집회 정도로나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뿌리내렸다는 얘기일까. 노동절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관심은 최근 들어 급격히 줄었다.

'전러시아여론조사센터' 조사에 따르면 올해엔 응답자의 45%가 노동절을 중요한 행사로 꼽았다. 한국에 비하면 여전히 많은 수지만 러시아에선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90% 이상의 응답자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것이 지난해엔 67%로 줄었고 올해 다시 큰 폭으로 준 것이다.

대신 러시아인 열에 아홉은 부활절이 중요하다고 꼽았다. 올해의 경우 약 84% 정도가 4월 30일 시작된 정교회의 부활절(정교회의 부활절은 서구 기독교와 달리 1주일 늦게 진행된다) 정교회사원을 찾아 미사에 참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당선자와 주요 각료들, 병색이 완연한 옐친 전 대통령까지도 정교회의 부활절 미사에 참석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를 기치로 내걸고 건국됐던 소련 시절 노동절은 가장 중요한 행사의 하나였다. 그러던 노동절이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 같다.

반면 70여년간 간신히 명맥만 유지해왔던 정교회의 부활절은 말 그대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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