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up] 최태원 SK그룹 회장, 베이징서 화낸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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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최태원(사진) 회장은 지난달 초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SK그룹 최고경영자(CEO) 경영 전략 세미나’에서 계열사 사장들에게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성공한 사업모델과 상품을 가지고 중국으로 나가는 공급자 중심 접근법에 한계가 드러났다. 국내외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선 글로벌 선도기술로 제3의 성장축을 마련해야 한다.”

그는 특히 “한국에 꼭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면 중국으로 가고, 현지에서 중국적 시각으로 돈이 되는 사업을 발굴하라”고 말했다.

사실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SK텔레콤은 그간 중국의 이동통신기간망 사업 진출을 노렸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또 SK에너지도 사업설비 등을 크게 확충하지 못했다. 국가 기간 시설에 대한 다른 국가 기업의 진출을 잘 도와주지 않는 중국 정부의 규제 때문이다. SK그룹이 올해 고전한 데 반해 다른 대기업들은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좋은 실적을 낸 것도 최 회장이 경영전략을 수정하게 된 계기가 됐다는 귀띔이다. SK그룹의 지난해 매출은 약105조원이었지만 올해는 90조원대로 예상된다.

SK그룹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최 회장은 ‘연구개발(R&D)통합 인큐베이션 센터 건설’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권오용 SK브랜드관리부문장은 “이미 설립안이 확정됐고 구체적으로 어느 곳에 어느 정도의 규모로 지을지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르면 다음 주중으로 이 센터 건설을 추진하고 향후 연구과제를 총괄한 임원들이 가려진다.

최 회장은 이 연구소를 기반으로 중국 전략을 다시 짜라고 강조했다. 그는 연구인력 대부분을 현지에서 채용하라는 제안까지 했다. “한국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성공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벗어나려면 중국 현지인의 아이디어가 녹아나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철저한 현지화를 주문한 셈이다.

SK계열사들은 최 회장의 중국 구상에 발맞춰 개별적으로 중국 사업 재편작업에 들어갔다. SK텔레콤은 갖고 있던 차이나유니콤의 주식 전량을 팔았다. 이 회사 관계자는 “주식을 보유해 경영에 참여하면서 이동통신 사업을 할 요량이었는데, 이보다는 기업을 상대로 솔루션과 콘텐트를 개발해 제공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전환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주식을 판 돈(1조5283억원)의 상당 부분이 ‘R&D통합 인큐베이션 센터’ 건설과 연구 자금으로 쓰일 것으로 보인다.

SK에너지는 국내 아스팔트 사업부 중 일부를 중국으로 이전해 아예 중국에서 법인을 차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SK에너지는 1993년부터 중국에 아스팔트를 수출하기 시작한 올 4월 누적 수출 1000만t을 넘어섰다. 이 회사의 대표적 중국 수출품이다.

SK네트웍스도 중국에 제2의 본사를 설립할 계획이다. 이창규 SK네트웍스 사장은 최근 사내 워크숍을 통해 “중국 본사를 구축하고 스피드메이트 사업과 철광석 사업 본사를 내년 초까지 중국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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