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북한…지금 변화중] 7. 전력난이 변화 부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지난해 12월 평양 고려호텔에 묵었던 장선섭(張瑄燮)경수로기획단장 일행은 추위에 떨며 밤잠을 설쳐야 했다. 난방이 안되는데다 온수도 나오지 않아서였다.

이들은 대북지원 경수로(輕水爐)발전소 공사가 지연된 데 따른 북측의 '심술부리기' 가 아닌가 생각하다가 곧 전력난의 심각성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호텔 객실 조명조차 껌벅이거나 정전을 거듭했다.

최근 고려호텔.보통강호텔에 투숙한 한국 기업인들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북측 안내인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공장.기업소 가동률이 높아지고 건설현장의 전력수요가 커지면서 오히려 가정용.사무실용 전기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한다" 고 설명했다고 한다.

북한에선 지난해 공장 가동률(통일부 추정치 18%)이 다소 높아지면서 산업현장이 일부 활기를 찾는 가운데 겨우내 전력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겨울 갈수기(渴水期)에는 특히 수량 부족으로 산업현장에 빨간불이 켜졌다. 수력.화력 발전설비 비율이 6대4여서 상황은 더 나빴다.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에 따라 미국이 제공하는 연간 50만t의 중유로 가동 중인 선봉화력발전소 외에는 화력발전이 모두 석탄으로 가동되는데 석탄생산마저 신통치 않다.

급기야 북한 당국자들조차도 전력난을 숨기지 않기에 이르렀다. 조창덕 내각부총리는 지난 2월 3일 관영 조선중앙통신과의 회견에서 "지금 인민경제 모든 부문에서 늘어나고 있는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생산과 건설에서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다" 고 털어놨다.

"오늘과같이 전력사정이 긴장한 때는 일찍이 있어보지 못했다" 는 말로 현실을 표현했다.

지난해 말 북한의 실질 발전설비 용량은 2백만㎾. 총발전설비 용량은 7백39만㎾에 이르지만 이미 못쓰게 되거나 보수해야 하는 게 5백39만㎾. 게다가 송배전(送配電) 시설이 안좋아 전력손실률이 33%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력난 사태의 심각성을 반영한 듯 당기관지 노동신문은 4월 21일자에 '전력생산과 전기절약투쟁을 힘있게 벌여야 한다' 는 제목 아래 김정일(金正日)당총비서의 전력관련 지시를 집중 편집했다. "지금과 같이 전기가 긴장할 때에는 전기를 적게 쓰거나 쓰지 않고 생산을 보장하는 사람을 애국자로 내세워야 한다" 는 지시가 나올 정도다.

북한당국은 전력난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지난달 4~6일 평양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국회) 제10기 3차회의는 경제재건 대책을 토의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수력발전소의 발전설비 정비보장 및 기술개조를 통해 발전효율을 높일 것과 화력발전소의 설비 가동에 주력한다는 방침이 재확인됐다.

신태록 내각 전기석탄공업상은 ▶실리보장 원칙 구현▶우선순위를 고려한 집중투자▶채산성 있는 탄광 개발▶발전소 건설▶송.변전선의 대대적 가설 등 여러가지 과제를 밝혔다.

그러나 이런 방침에도 불구하고 경제재건에 필요한 전력수요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데 북한당국의 고민이 있다. 조창덕 부총리의 회견이 외부 지원의 필요성을 넌지시 비춘 것이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지난 3월 뉴욕 북.미회담에서 경수로 건설지연에 따른 전력손실 보상문제를 제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북측이 남북 정상회담에 호응해 나온 배경에 전력난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도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북한은 요즘 공장가동 중단이라는 눈앞의 위기를 풀기 위해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를 내세워 발전기 외상구입 가능성을 여기저기 타진하고 있다. 북한 공장을 둘러볼 기회를 가진 이상만(李相萬)중앙대 교수도 "대북지원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공장용 발전기" 라고 강조했다.

북측은 또 송배전 설비를 통해 남측 전기를 공급받는 것에도 관심을 갖고 있으며 화력발전소용 석탄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부 홍성국(洪性國)북한경제과학담당관은 "북한은 대북지원 인프라 중 발전소를 지어주길 바랄 것" 이라고 내다봤다. 북한당국이 전력난 타개를 위해서도 대외교류에 적극 나서는 만큼 우리 정부의 남북경제공동체 구상이 점차 힘을 얻게 될 전망이다.

특별취재반〓유영구.최원기.정창현.이영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