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신 대수술] 下.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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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투신사 부실이 문제될 때마다 나오는 투신사들의 변명은 "그게 어디 우리만의 책임이냐" 는 것이었다. 1989년 12.12 증시부양책에서부터 한남.신세기투신의 강제 인수, 대우채권에 대한 사실상 원금 보장까지 정부의 정책실패에서 비롯된 부분이 더 크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최근 투신권에 대한 고객들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것은 투신 스스로가 투명하지 못한 경영을 해온 데 1차적 원인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대우사태의 직격탄을 그대로 맞은 이유도 투신들이 외형경쟁 과정에서 수익률을 높이려고 위험도를 따지지 않고 아무 채권이나 편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투신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에 앞서 투신사들이 스스로 뼈를 깎는 자구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재벌 계열 투신은 대주주가 나서 부실을 해결하려는 성의를 보이지 않는 한 문제를 풀기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와 함께 투신이 부실을 털어낸 후에도 제기능을 다하기 위해선 그동안 미뤄왔던 각종 제도와 관행에 대한 수술작업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 펀드운영의 투명성 높여야〓최근 현대.동양.제일투신에 대한 금융감독원의 특별검사 결과 그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투신의 불법 편.출입과 계열사 자금지원 실상이 낱낱이 드러났다.

심지어 대우채권을 처리하기 위해 '배드펀드(부실채권만 모아 놓은 펀드)' 를 몰래 만들고 이 펀드를 근거로 발행한 수익증권을 고객들의 펀드에 슬그머니 끼워 넣어 수익률을 떨어뜨린 사실도 적발됐다.

한도와 관계없이 계열사에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의 돈을 퍼다준 일은 다반사였다. 한 투신사 펀드매니저는 "부실채권 편.출입은 누구나 다 알면서도 쉬쉬해온 문제" 라고 털어놓았다.

96년 이후 설립된 투신운용사들이 대우사태로 골병이 든 이유도 따지고 보면 무리한 외형경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D투신사의 관계자는 "은행계열 투신사들은 외형을 늘리기 위해 수익에 도움이 안되는 공사채형 수익증권을 늘리는 데 급급했다" 고 꼬집었다.

금융연구원 김우진 박사는 "투신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부실도 정리해야 하지만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시급하다" 며 "이를 위해 철저한 자구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고 지적했다.

◇ 제도.관행 시급히 고쳐야〓투신에 대한 신뢰회복이 시급한 만큼 투신의 자구노력을 전제로 공적 자금을 투입, 과감하게 부실을 정리한 뒤 제도.관행의 개편도 앞당겨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무엇보다 공시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펀드평가 우재룡 사장은 "현행 투신업법상 운용실적은 1년에 한차례만 알려주면 되고 판매할 때도 약관과 투자신탁설명서 등을 줘야 하는데 어려운 용어에 깨알같은 글씨로 돼 있어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며 "형식상으로만 공시를 강화할 게 아니라 일반인이 쉽게 알 수 있도록 공시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 고 강조했다.

동덕여대 경영학과 유극렬 교수는 "펀드의 운용내역을 주주 이외의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공시해 펀드운용방식 등을 시장에서 평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하반기부터 도입키로 한 채권시가(時價)평가제는 투신상품이 실적배당상품으로 자리잡기 위해 '반드시 시행돼야 하는 것으로 '가능한 앞당겨 시행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야만 투신사가 투자자들에게 수익률을 보장해온 관행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펀드에 편입되는 자산의 만기와 관계없이 환매수수료 부과기간에 따라 장.단기 상품으로 나뉘는 것도 개선해야 할 점이다.

환매수수료 부과기간이 3개월, 6개월로 획일적으로 돼 있어 이게 만기로 인식되기 때문에 펀드에 들어 있는 자산의 만기와 관계없이 일정기간을 주기로 대규모 환매가 일어난다는 얘기다.

최근 주식형 수익증권의 환매가 몰린 것도 지난해 하반기 판매된 수익증권의 환매수수료 부과기간이 끝나자 이를 새 펀드로 옮기기 위해 돈을 찾은 사람이 많았다는 게 투신업계 분석이다.

투신이 신뢰를 신속히 회복한다면 개방형 뮤추얼펀드의 도입도 미룰 이유가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투신업계의 경영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뮤추얼펀드 쪽으로 자금이 옮겨가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처럼 재벌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회사형인 뮤추얼펀드 형태로 투신업계가 재편되는 것이 재벌의 사(私)금고화를 막는 방편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 투자자도 바뀌어야〓한국펀드평가의 우사장은 "국내에선 투신이 은행과 같은 저축기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며 "투신은 주식이나 채권을 간접 투자해 주는 투자기관이란 점을 투자자들이 명심해야 한다" 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투신협회가 투자자 1천명에게 물어본 결과 응답자의 약 60%가 원금보장형 상품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투신도 수익증권을 팔면서 퇴직금으로 받은 돈을 스폿펀드에 집어넣으라는 식의 영업행태는 지양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우사장은 "투신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는 증권업협회.투신협회.금감원 등 관계기관에도 책임이 있다" 며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학교 방문이나 교과과정을 통해 투자자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송상훈.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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