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어려운 개발원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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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특히 경제발전 과정에서 우리보다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는 자칫 잘못하면 시기와 섭섭함과 규탄의 대상이 되어버릴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인간관계에 못지않게 국가관계에서도 유의해야 되는 것이다. 함께 가난의 어려움을 나누던 처지에서 어느 날 누가 살림이 피어 부자들 자리 말석에 앉게 되었다고 ‘이제부터는 도움을 주겠다’며 호기를 부린다면 옛 친구들은 당연히 고마움의 눈빛보다는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려 할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엔 DAC 회원국 가운데서 공식개발원조의 규모가 아직은 최하위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개발원조국 대열에 참여하게 된 바로 지금부터 국제협력과 지원에 대한 우리의 기본 철학과 자세, 목표, 전략, 조직 등 모든 것을 신중하게 가다듬어 나가야 하겠다.

며칠 전 ‘국제개발협력의 도전과 과제’를 주제로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의 기조연설에서 한국과 오랜 인연을 가진 네팔 출신의 외교관이 너무나 솔직한 충고를 남기고 갔다. 유엔의 사무차장보와 유니세프의 사무차장을 역임했던 쿨 찬드라 가우탐 씨는 오랫동안 개발도상국의 여성과 아동의 복지향상을 위한 국제적 노력에 앞장선 지도자로서 한국의 발전과정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지켜봐온 친구다. 그는 한국이 국제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된 첫 번째 경우이기에 지금도 원조를 받아야 하는 개발도상국들의 한국에 대한 기대는 특별한 것임을 강조했다. 한때는 제국주의 세력들이었으며 지금은 개발원조국이 된 선진국들의 자세나 정책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원조모델을 한국이 보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개도국을 동정(sympathy)하는 선진국이 아니라 그들과 애환의 정을 함께 나누는(empathy) 친구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작의 길목에 선 한국의 개발원조는 어떤 것들을 피해야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개발원조를 국력 과시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전시행정의 병폐라 하겠다. 가우탐 씨는 우리의 아프가니스탄 부통령관저 건축을 한 예로 들었다. 공식적 개발원조와 선심성 선물은 반드시 구별돼야 한다는 것이다. 개발원조가 우리의 수출증대나 자원확보의 수단으로 보여서도 안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개발원조 대상의 우선순위를 현명하게 선택하는 철학과 전략을 확립해 잡다한 원조 프로그램이 혼란스럽게 시도되지 않고 장기적 국가발전의 터전이 되는 기본 분야에 일관성 있게 집중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스스로의 발전 경험을 되돌아본다면 교육을 통한 인간개발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것이 성공의 열쇠였음을 기억하고 이를 개발원조의 정책결정에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개발원조는 나라의 품위 즉 국격을 국제사회에서 가장 잘 반영하는 분야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주는 우리의 모양새보다도 받는 나라들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자세로 임해야 하겠다. 예부터 우리 민족이 지켜온 겸손과 나눔과 너그러움의 미덕을 지구촌공동체 건설 과정에서도 지켜가야 할 것이다. 국제사회는 지금 개발원조의 경쟁시대를 넘어 공여국 간의 공조는 물론, 공여국과 수원국이 원조의 우선순위와 집행전략을 함께 상의하며 결정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도 열린 마음으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건설적으로 연계하는 중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설 때다. DAC는 물론 G20 모임도 바로 이러한 우리의 공생 철학을 전파하는 장이 되기를 바란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고문